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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해방

바바라 폴리, 상호교차성: 한 마르크스주의자의 비판

원제: Intersectionality: A Marxist Critique


https://multiracialunity.org/2018/09/26/intersectionality-a-marxist-critique/ 



상호교차성이 사회불평등의 성격과 원인에 관한 한 가지 사고방식은 다음을 제시한다. 다양한 형태의 억압의 효과가 누적적이고 그 용어가 제안하는 바에 따르면 서로 얽혀있다.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호모포비아, 장애차별주의(disablism), 종교적 편견, 소위 “계급주의”는 많은 사람들의 삶에 고통과 피해를 입히며, 이러한 억압 유형 중 두 가지 이상이 해당 개인이나 인구부문의 삶에서 동시에 경험될 수 있다. 상호교차성 모델에 따르면, 주류 사회의 주변부로 내몰린 많은 사람들의 복합적인 경험을 설명해야만 사회정의에 관한 여러 문제들이 효과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상호교차성이 한 가지 분석모델이자 실용적 프로그램으로서 유용한지 평가하려면 —또한 수많은 주창자들이 주장하듯이 상호교차성을 실제로 “이론”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지 결정하려면— 우리는 상호교차성이 어떤 질문을 촉진하고 해소하는지 뿐 아니라, 어떤 질문을 저해하고 어떤 해법을 배제하는지 물을 필요가 있다.


상호교차성을 논의할 때 여러 중요한 선구자들—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에서 안나 줄리아 쿠퍼(Anna Julia Cooper)까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Alexandra Kollontai)부터 클라우디아 존스(Claudia Jones), 컴바히 강 공동체(Combahee River Collective)까지—을 인용하는 것이 상례이다. 하지만 1980년대 말에 처음으로 상호교차성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해석한 법 이론가 킴벌리 크렌쇼(Kimberlé Crenshaw)의 노고를 빼놓을 수 없다. 크렌쇼는 제너럴모터스(General Motors, 이하 GM)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노동자가 마주한 차별적인 상황을 극복하는 것에 관해, 젠더와 인종을 소송의 근거로서 표기하는 기존 범주들이 부정확하다는 점을 증명하였다. 이러한 범주들이 해당 개인의 사례에 동시에 쓰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여성이거나 비(非)백인종이어야 하지만, 동시에 비(非)백인종 여성일 수 없다. 크렌쇼는 인종과 젠더를 의미하는 두 도로의 교차점이라는 유명한 은유를 발전시켰으며, 교차점에서 일어난 사고는 단순히 한 가지 원인 탓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였다. 상호교차성은 사고가 일어나게 만드는 서로 가로지르는 두 개의 도로를 따라 일어나는 움직임을 다룬다. (Crenshaw, 1989)


크렌쇼의 모델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페미니스트 작가 패트리샤 힐 콜린스(Patricia Hill Collins)가 명명한 “억압의 매트릭스”의 작동을 능숙하게 기술하였다. 하지만 상호교차성 모델의 공간적 이차원성은 이 모델이 왜 애초에 이러한 “매트릭스”가 존재하는지를 설명하는 데에 부적절하다는 점을 지시한다. (Collins, 1990) 누가 이 도로들을 만들었는가? 왜 특정한 사람들이 그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가? 도로는 어디에 그리고 언제 건설되었는가? 공간적 모델은 이와 같은 질문들을 저해한다. 논의되는 흑인 여성이 기껏해야 약소한 임금을 벌지만 GM의 사장들을 매우 부유하게 만들어주는 노동자라는 사실은, 단순히 주어진 것으로 취급된다. 즉, 교차하는 도로라는 은유로 돌아가자면 도로가 지어진 기반은 기정사실일 뿐 전혀 의문이 제기되지도 않는다. 크렌쇼가 이 GM 노동자들이 이중의 차별에 종속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이 성공이 그녀가 재현한 이 여성들에게 상당한 가치가 있는 법률적 결과이라는 점은 의심할 수 없다— 그녀의 분석 및 보상에 관한 모델은 법이라는 한계에 국한되어 있다. 마르크스주의-페미니스트 이론가 델리아 아길라(Delia Aguilar)가 반어적으로 기록하였듯이, 계급은 문제되는 그 노동자에게 “소송의 근거가 되는” 범주조차 아니었다. (Aguilar, 2015, 209)


내가 제시하는 바는, 상호교차성이 다양한 억압들의 효과를 기술하는 데에 유용할 수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의 사회불평등의 근본 원인을 다루는 적절한 설명틀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누군가가 불평등의 이유에 관한 다른 종류의 질문을 묻기 시작할 때, 상호교차성은 그 질문에 장벽을 놓을 수 있다—그 시기란, 누군가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노동 착취에 기초한 사회적 관계의 존재를 전제하는 “권리”와 제도적 정책에 관한 담론을 넘어설 때이다.


젠더, 인종, 계급. 이 범주들—테리 이글턴이 한 때 ”현대의 삼위일체”(Eagleton, 1986, 82)라고 칭했고 혹은 마르타 히메네즈(Martha Gimenez)가 “삼부작”이라 표현했던 범주들(Gimenez, 2001)—은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가? 젠더, 인종, 계급이 분석 범주라면, 그것들은 통약가능한가 (즉, 종이라는 측면에서 비슷한가) 혹은 구별되는가? 이 범주들의 인과적 역할은 일종의 위계질서 속에 위치시킬 수 있는가, 혹은 이 범주들이 “상호구속적”이고 동시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인과적 “요소들”인 다른 범주와 기본적으로 대등할 필요가 있는가?


내가 이 질문하면서 주장하는 바는, 흑인여성 자동차 노동자가 월요일과 수요일에는 흑인이고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여성이며 금요일에는 프롤레타리아트이고, —덧붙여서— 토요일에는 무슬림이라는 것이 아니다. (일요일에는 그녀가 또 다른 자아를 선택하도록 내버려 두자) (나는 캐스린 러셀(Kathryn Russell)에게 이러한 매우 재치있는 표현을 빚지고 있으며, 이 표현에 관해서는 다음을 보라. [Russell, 2007]) 하지만 내가 제기하고 있는 바는, 몇 가지 원인이 다른 것들에 비하여 선행한다는 점이다—그리고 더욱이, 젠더, 인종, 계급은 서로 비교가능한 정체성으로 간주될 수 있으나, 실제로는 각자 꽤나 상이한 분석적 접근법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계급분석의 설명적 우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이 섞이며, 억압과 착취의 구분이 핵심적으로 중요해진다. 그레고리 메이어슨(Gregory Meyerson)이 이야기하였듯이, 억압은 실로 다양하고 상호교차하며 여러 종류의 경험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억압의 원인은 다양하지 않고 단일하다. (Meyerson, 2000) 즉, ”인종”이 인종차별을 야기하지 않으며, 젠더가 성차별을 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억압 양식으로서— “인종”과 젠더가 역사적으로 노동분업에 의해 형성된 방식은 계급분석이 제공하는 설명틀 속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이해되어야 한다. 이 계급분석이 중시하는 쟁점은 착취, 즉 사회가 필요한 사물을 생산하는 이들의 노동으로부터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잉여가치”를 추출하여 얻은 이윤이다. (젠더에 따른 역사적 노동분업을 고려할 때, 우리는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주장하였듯이, 일부일처제 혼인의 기원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인종”에 따른 역사적 노동분업은 주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근대적 노예제도의 시기에서 유래하였다. [Fields and Fields; Baptist]) 이브 미첼(Eve Mitchell)이 지적하듯이 계급분석이 무시될 경우 그 자체로 착취된 노동의 산물인 정체성의 유형을 규정하는 범주들은 당연하게 보이나 분석과정에서 정당화되기에 이른다. (Mitchell, 2013)


상호교차성의 한계에 대한 효과적인 비판은, 사회적 계급이 흔히 쓰이는 것보다 더욱 견고하고 유물론적으로 이해되도록 정식화하는 일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즉, 정체성이나 경험범주로서의 계급이 아니라, 구조를 설명하는 양식으로서 계급분석이다. 칼 마르크스의 여러 저작에서 “계급”은 여러 방식으로 나타난다. 때로는 『자본론』 1권의 “노동일”에 관한 장[10장—역자주]에서처럼 계급은 경험적 범주로, 공장의 먼지를 들이마시는 아이들, 역직기에 손가락을 잃은 남성들, 바지선을 끄는 여성들, 불타는 태양 아래서 목화를 따는 노예들이 처한 범주이다. (Marx, 1990, 340-416). 이 모든 사람들은 억압받으면서 동시에 착취당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마르크스에게 계급은 하나의 관계, 사회적 생산관계이다. 이 점이 『자본론』의 첫 번째 장에서 그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결합이자, 해소될 수 없는 계급적대의 체현물이라는 특이한 정체를 지닌 상품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었던 이유다. 계급분석의 우선성을 주장하는 것은, 한 노동자가 주부보다 더 중요하거나 심지어 그 노동자가 자신을 먼저 노동자로서 생각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게다가 그녀는 배우자의 학대나 경찰의 잔혹함에 대한 그녀의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하여, 자신을 여성으로 혹은 흑인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제시하려는 바는, 인간의 생산적 활동이 조직되는 방식—그리고 계급사회에서 인간의 생산적 활동이 다수가 서로로부터 분리되고 소수의 이익을 위해 노동하도록 보장하고자 인구의 대중을 여러 범주들로 쪼개어지도록 내모는 방식—과 이러한 계급기반 조직이야말로 사회불평등을 이해하길 바란다면 탐구가 필요한 주요한 쟁점을 구성한다는 점이다. 젠더나 “인종”을 억압양식으로서 계급으로 “환원”하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착취와 억압의 구별이 여러 종류의 억압의 물질적인 (즉, 사회에 기반한) 뿌리를 이해를 가능하게 만든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또한 빈번히 듣는 용어인 “계급주의”는 매우 결함있는 개념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러한 용어는 계급을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라는 이데올로기와 등가적인, 편견있는 태도의 집합으로 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나는 우리에게 계급에 기반한 반감이 더욱 필요하다고 말한다.


마치며, 나는 상호교차성이 하나의 설명틀로서가 아니라 그것이 중요해진 이 시대의 이데올로기적 반영물로서 가치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다음을 보라 Wallis, 2015) 이 시대—지금으로부터 수십년 전까지 걸친 시대—는 여러 상호연관된 발전으로 특징지어진다. 한 가지는 주로 중국과 소련에서 노동자가 운영하는 평등주의적 사회를 만들고 공고히 하려는 운동의 (장기적으로 보면 일시적이지만) 세계사적 패배이다. 또 다른 것—첫번째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진 않으나—은 세계 노동자의 생활수준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계급에 기반하고 계급의식적인 자본에 대한 저항의 토양을 제공해온 노동자들의 연합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공격이다. 노동인구를 여러 종류의 위태로운 긱 경제로 쪼개는 “유연적 축적(flexible accumulation)”(Harvey, 1990, 141-72)이라고 불린 체제의 성장은 미국만이 아니라 세계의 노동계급에 대한 이러한 자본가의 공격을 수반했으며 이 공격을 공고히 했다. 몇십 년 동안 이러한 뒤바뀐 경제상황의 정치적 표현은,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계급에 기반하지 않은 여러 개혁운동을 둘러싼 다원주의적인 연합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신사회운동”의 등장이었다. 이러한 모든 발전에 중심적이었던 것은 엘렌 메익신스 우드가 발명한 문구인 “계급으로부터의 후퇴”(Wood, 1986)였다. 학계에서 이러한 후퇴는 마르크스주의가 여러 대안적인 방법론에 의해 보충될 필요가 있는 계급환원론적인 “거대 서사”라며 공격하는 모습에서 나타났다. (Laclau and Mouffe)



이러한 연관된 현상들은 몇몇 경우 오늘날 이데올로기라는 우리가 숨쉬는 공기를 이루고 있다. 상호교차성은 많은 방식으로 이러한 경제적 및 정치적 발전의 반영이자 그에 대한 반응이다. 우리들 중 누군가가 매일 더욱 심해지는 사회불평등의 원인을 파악하려 상호교차성을 바라본다면, 미국과 세계의, 반인종주의적이고 반성차별주의적이며 국제주의적인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서 분석과 해법을 찾는 편이 나을 것이다. 멀지 않은 미래에 일어날 사회의 공산주의적 변혁을 상상하는 마르크스주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