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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해방

크리스틴 R. 고드시, 왜 여성들은 사회주의에서 더 좋은 성생활을 누릴 수 있었는가?

원제: Why Women Had Better Sex Under Socialism


https://www.nytimes.com/2017/08/12/opinion/why-women-had-better-sex-under-socialism.html


1955년 모스크바 근방의 집단농장에서 일하는 여성.


미국인들이 동유럽의 공산주의를 생각할 때 여행제한, 으스스한 잿빛 콘크리트 전경, 텅 빈 시장에서 상점으로 가는 긴 줄을 기다리는 비참한 남녀, 시민들의 사생활을 염탐하는 치안기구를 상상한다. 이 중 많은 것이 진실이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인 편견은 그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누군가는 동구권의 여성들이 그 당시 자유민주주의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교육 및 훈련에 대한 국가의 상당한 투자, 여성들의 노동인구로의 완전한 편입, 너그러운 출산휴가수당, 무료 보육보장을 비롯해 많은 권리들과 특권들을 누렸다는 점을 기억할지 모른다. 하지만 한가지, 거의 주목받지 못해왔던 장점이 있다. 공산주의에서 여성들은 더욱 성적 쾌락을 누렸다는 점이다.


1990년 통일 이후에 수행된, 동독과 서독 간의 비교사회학적 연구는 동독 여성들이 서독 여성보다 두 배만큼의 오르가즘을 느꼈다고 밝혔다. 연구자들은 보고된 성적 만족감의 이러한 차이에 경탄하였다. 특히 동독 여성들이 공식적 고용과 집안일이라는 악명높은 이중의 짐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전후세대 서독 여성들은 집에 머무르면서, 호황상태인 자본주의 경제가 만든 모든 노동절약장치들을 누려왔다. 하지만 그들은 화장지를 사러 긴 줄을 서야했던 여성들보다 성관계를 적게 하였고 그 만족도도 적었다.

철의 장막 뒤에 있는 이러한 삶의 양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불가리아의 아나 두르체바(Ana 두르체바)를 생각해보자. 그녀는 내가 2011년에 처음으로 만났던 당시 65세였다. 공산주의 아래서 첫 43년을 살아왔던 그녀는, 새로운 자유시장이 불가리아인들이 건강한 육욕관계를 발달시킬 능력을 저해한다고 종종 불평하였다.

“그래, 그 당시에 몇 가지는 나쁜 것도 있었지만 내 삶은 로맨스로 가득했어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이혼한 뒤에 일자리를 갖고 급여를 받았고, 나를 부양할 남자가 필요하지 않았어요. 내가 원하면 그렇게 할 수 있었지요.”

두르체바 씨는 여러 해 동안 비혼모로 살았으나 1989년 이전까지 그녀의 삶은 1970년대 후반에 태어난 딸이 스트레스 받으며 생활하는 것보다 더욱 만족스러웠다고 주장하였다.
“딸은 항상 일만 하죠.” 2013년에 두르체바 씨는 내게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그 아이는 밤에 늦게 집에 돌아오면 너무 지쳐서 남편이랑 같이 있지를 못해요. 하지만 별 문제는 없어요. 남편도 지쳤으니까. 그 둘은 좀비처럼 텔레비전 앞에 같이 앉아 있어요. 내가 그 나이였을 때 우리는 엄청 즐거웠는데 말이에요.”

작년 구 동독의 대학도시인 예나에서, 나는 다니엘라 그루베르(Daniela Gruber)라는 이름의 최근 결혼한 삼십줄의 여성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의 어머니는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그루베르 씨에게 아이를 가지라고 압력을 넣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해하지 못해요—장벽이 무너지기 전에 여성들에게는 편했지만요.” 그녀는 1989년 베를린 장벽 해체를 언급하면서 내게 이야기하였다. “그 때 여성들은 유치원과 탁아소가 있었고요, 출산휴가를 받고 그녀들을 위한 일자리도 갖고 있었죠. 저는 하청의 하청으로 일하고 임신할 시간도 없다고요.”

1989년 전후로 어른이 되었던 어머니와 딸 사이의 이러한 세대격차는 여성들이 공산주의 시대 동안 더욱 만족스러운 삶을 누렸다는 생각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그녀들은 이 삶의 질을 부분적으로, 이러한 정권들이 여성해방을 선진 “과학적 사회주의” 사회에 중심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사실에 빚지고 있었다. 그녀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였다.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한 산업화 프로그램을 실현시키려면 여성의 노동이 필요했을지라도, 여성과 남성의 평등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기초는 19세기에 아우구스트 베벨과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놓았다. 볼셰비키가 장악한 뒤, 블라디미르 레닌과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초창기 몇 년 동안의 소련에서 성혁명을 가능하게 하였고, 콜론타이는 사랑이 경제적 고려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러시아는 1917년에 완전한 참정권을 여성들로 확대하였고, 이것은 미국이 했던 것보다 3년 앞선 것이었다. 또한 볼셰비키는 이혼법을 자유화하고 재생산권을 보장하며, 공공세탁소와 인민배급소(people’s canteens)에 투자하여 가내노동을 사회화하려 시도하였다. 여성들은 노동인구로 동원되었고, 재정적으로 남성으로부터 풀려나게 되었다.

1920년대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 여성들은 무슬림 여성들의 해방을 위한 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하향식 캠페인은 각지의 족장들로부터의 폭력을 동반한 반발과 마주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여자형제, 아내, 딸이 전통의 족쇄에서 벗어나길 바라지 않았다.



1930년대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소련 초기에 이룬 여성권의 진보 중 많은 것들을 되돌렸다—임신중절을 불법화하고 핵가족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급속한 남성노동 부족은 다른 공산주의 정부들에 여성해방을 위한 여러 프로그램들을 진전시키도록 자극하였다. 이 중에는 국가가 지원하는 여성의 섹슈얼리티의 신비에 관한 연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동유럽 여성들은 서구로 이동하거나 자유 출판물을 읽을 수 없었지만, 과학적 사회주의는 몇 가지 이점을 동반하였다.

“빠른 경우 1952년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성(性)과학자들은 여성의 오르가즘에 관한 연구를 하기 시작했고, 1962년에 그 주제만을 다룬 회의를 개최하였습니다.” 체코 공화국의 마사리크 대학교(Masaryk University)의 카테리나 리쉬코바(Kateřina Lišková) 교수는 내게 이렇게 전하였다. “그들은 여성의 쾌락에 핵심적인 구성요소로서 남녀 간 평등의 중요성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몇몇은 남성이 집안일과 양육을 공유할 필요가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좋은 성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바르샤바 대학교(University of Warsaw) 부교수 아그녜쉬카 코쉬챠인스카(Agnieszka Kościańska)는 내게 1989년 이전의 폴란드 성과학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들은] 성관계를 육체적인 경험에 한정하지 않았고, 성적 쾌락에 사회문화적 맥락의 중요성을 다루었습니다.” 그것이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국가사회주의의 대답이었다. “그들은 여성이 미래와 재정적 안정을 걱정하며 스트레스를 받거나 과로한 경우, 최고의 성적 자극조차 쾌락에 도달하도록 돕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모든 바르샤바조약 가입국에서, 일당지배의 시행은 가족과 관련된 법률의 전면적인 개정을 촉발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주된 자원을 여성의 교육과 훈련만이 아니라 그녀들의 고용을 보장하는 데에 투자하였다. 국가가 운영하는 여성위원회들은 남아들이 여아들을 온전한 동료로 받아들이도록 재교육시키려 모색하였고, 동지들에게 남성우월주의가 사회주의 이전의 과거의 잔여물이라는 점을 납득시키려 시도하였다.



성별에 따른 임금격차와 노동분업이 잔존하였고 공산주의자들이 전혀 가족 안의 가부장제를 온전히 개혁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공산주의자들은 서구 여성들이 거의 상상할 수 없었던 정도의 자기만족감을 누렸다. 동구권 여성들은 돈 때문에 결혼하거나 성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었다. 사회주의 국가는 그녀들의 기본적인 욕구에 부응하였고, 불가리아,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동독과 같은 나라들은 추가적인 자원을 비혼모, 이혼여성, 홀어미를 지원하는 데에 사용하였다. 루마니아, 알바니아, 스탈린 시기의 소련이라는 기록된 예외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동유럽 나라들은 성교육과 임신중절에 대한 접근성을 보장하였다. 이것은 우연적인 임신의 사회적 비용을 감소시키고 어머니가 되는 경우의 기회비용을 낮추었다.

서구의 몇몇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마지못해 이러한 성과들을 인정하였으나, 독립적인 여성운동으로 등장하지 않았으며 위로부터의 해방의 일종을 대표한다는 이유로 국가사회주의의 성과에 비판적이었다. 오늘날의 많은 강단 페미니스트들은 선택권을 찬양하지만, 또한 상호교차성의 의무에 영향을 받아 문화상대주의를 받아들였다. 동등한 여성의 권리와 같은 보편주의적 가치들을 시행하도록 모색하는 하향식 정치프로그램은 유행에서 매우 뒤떨어져 있다.

불행히도, 그 결과는 구 바르샤바조약 가입국에서 여성해방의 진보 중 많은 것이 상실되었거나 뒤집어졌다는 것이다. 두르체바 씨의 성인이 된 딸과, 젊은 그루베르 씨는 이제 한때 공산주의 정부가 어머니 세대를 해결해주었던 일과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 애쓰고 있다.

“공화국은 내게 자유를 주었어요.” 언젠가 두르체바 씨는 내게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을 언급하며 이야기를 전했다. “민주주의는 그 자유 중 일부를 가져가 버렸지요.”

그루베르 씨의 경우, 그녀는 동독 공산주의의 잔혹함에 대해 어떤 환상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지금 상황이 더욱 어려워지지 않았기를” 바랐다.

여성 공산주의자들은 —일, 가정, 그리고 침대에서의— 성적 평등을 옹호하고 기꺼이 시행하려 했기 때문에, 국가기구의 직위를 차지했던 그녀들은 문화제국주의자라고 불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도입한 해방은 전지구의 수백만 명의 삶을 변화시켰다. 그 중에는 오늘날 유럽연합 회원인 민주국가의 성인들의 어머니이자 할머니로 우리 주변을 돌아다니는 많은 여성들이 있다. 이 동지들이 정부개입을 강조했던 것은, 우리의 포스트모던한 감수성에 너무 가혹한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곧 자연의 질서로 보이게 될— 필수적인 사회적 변화는 위로부터의 해방선포가 필요하다.




2017년 8월 20일자 정정
지난 주, 공산주의 아래에 있던 동유럽 여성들의 삶을 다룬 오피니언 기사[이 글을 이야기함—역자주]는 1917년 러시아에서 여성참정권을 시행한 책임자를 잘못 기재하였습니다. 여성참정권은 동년 7월에 볼셰비키가 아닌 임시정부 하에서 성취되었습니다. 볼셰비키는 11월 이전까지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