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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해방

샌드라 블러드워스, 여성억압의 기원들―엥겔스를 위한 변론과 새로운 출발점

원제: The origins of women’s oppression – a defence of Engels and a new departure[각주:1]


http://marxistleftreview.org/index.php/no-16-summer-2018/158-the-origins-of-women-s-oppression-a-defence-of-engels-and-a-new-departure




“사회 발전의 초기에 여자가 남자의 노예였다는 견해는 18세기 계몽사상에서 물려받은 지극히 불합리한 관념 중 하나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각주:2]



“마르크스주의 분석의 근본 원리는 … 인간진화를 인도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나 원리는 없다는 점이다. 또한 마르크스주의는 변화를 사회체계 자체에 내재적인 힘에 의해 산출되는 것으로 본다. 달리 말해, 원인은 사회조직에 외재적이지도 독립적이지도 않다. 불가피한 인구성장이나 생태조건, 신의 의지는 전쟁이나 빈곤, 성차별주의, 여타 사회문제를 설명하지 않는다.”

―캐런 색스, 『자매와 아내. 성평등의 과거와 미래』[각주:3]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저서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이하 『기원』)이 1884년 출간되었다. 엥겔스는 『기원』에서 초기 인류가 위계질서 없는 사회에서 살았으며, 그러한 사회에서 여성은 억압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계급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으며 남성이 항상 여성을 지배했던 것은 아니라는 이 생각은, 사회과학 학계에서 터무니없는 것이라며 널리 그리고 체계적으로 비난을 받아왔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기원』은 특히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논쟁주제로 남아있다.


엥겔스의 논증에는 여러 약점이 존재하지만, 단순히 그 이유가 엥겔스가 오늘날에는 대체된 그 시대의 지식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은 아니다. 엥겔스가 당시에 여성의 권리를 지지하던 진보적인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관해 많은 편견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원』이 지닌 중요성은 널리 인정받는다. 마르크스주의를 지지했다는 점이 알려져 있지 않은 페미니스트 이론가 거다 러너(Gerda Lerner)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자명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엥겔스는 우리가 사회와 역사 속에서 여성의 지위를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 재산을 가진 엘리트의 지배에 근거한 고대국가 형성기에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를 위치시킴으로써 그는 그 사건에 역사성을 부여했다. 엥겔스는 이러한 명제들 중 어떤 것도 증명할 수 없었지만 이후 100년간의 주요한 이론적 질문들을 규정했다.[각주:4]


우선, 엥겔스는 자신과 마르크스가 미국의 인류학자 루이스 헨리 모건(Lewis Henry Morgan)의 연구에 관해 남긴 기록을 요약하였다. 그는 또한 스위스의 역사가이자 고고학자 요한 바호펜(Johann Bachofen)의 고대사회 가족사 연구를 받아들였고, 게르만족 사회와 켈트족 사회에 대한 엥겔스 본인의 연구에 의존하였다. 이 책은 다소 고립되어 있는 별개의 저작이 아니었다. 『기원』은 엥겔스와 마르크스가 유명한 저작들인 『독일 이데올로기』, 『포이어바흐 테제』, 『공산당 선언』, 『자본론』에서 발전시킨 생각들과 함께 고려할 때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협력하여 자본주의 사회를 이해하고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모든 악화와 억압을 이해하려 노력했고, 이러한 노력에는 여성억압의 문제를 포착하는 일도 초기 저술부터 포함되어 있었다. 마르크스는 25세에 쓴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다음 해에 쓴 『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와 『신성 가족』에서 빈번하게 여성의 노예화와 여성해방의 필요성에 관해 논평했다.[각주:5] 엥겔스는 1844년부터 1845년 초까지 쓴 첫 주요저작인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에서 여성노동자의 조건이 위태롭고 취약해지고 있다는 점으로 반복해서 돌아간다. 그는 여성에게 일을 시키고 남성이 실업하여 집에 남아있는 상황이 여성과 남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논의하며, 자유주의 논평가들이 이 문제를 도덕화하는 데에 반대주장을 펼친다. 엥겔스가 말하길, 이 점은 부자연스러워 보이겠으나 다음의 이유에서 그렇게 보아야한다. “남녀 간의 본래 관계에 몇 가지 근본적인 오류가 있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지배가 … 부자연스럽다면,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지배도 마찬가지로 반드시 부자연스러워야 한다.”[각주:6]


『기원』의 비판자들 대부분이 무시하지만, 엥겔스의 논문 『유인원에서 인간으로의 이행에서 노동이 한 역할』은 인류의 발전을 이해하는 데에 굳건한 기초를 놓았다. 엥겔스는 다윈의 진화론에 입각했지만, 이론적으로는 자신과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결론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직립보행으로 자유로워진 손의 사용이 인류가 도구를 제작하는 길로 발전하도록 이끌었다. 그러므로 이 점은 지능의 성장과 언어의 발달로 이어졌다. 다음 세기 동안 일련의 논쟁이 이뤄지고 엉터리 증거가 제시된 뒤, 1974년에 아프리카에서 유인원 수준의 두뇌를 지녔으나 직립상태인 350만년 된 해골이 발견되었다. 명백하게 항상 엥겔스 덕분만은 아니겠지만, 이 점은 그의 가정이 널리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논문의 논점은, 엥겔스의 기본적인 가정―여성의 억압이 계급으로 사회의 분화 및 국가의 등장과 동시에 발생했다는 가정―이 타당한지 여부를 고려하는 데에 있다. 나는 엥겔스의 모든 오류나 약점을 다루지 않을 것이다. 그 중 다수는 이 질문에 부차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엥겔스의 비판가들이 한 모든 주장에도 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 중 다수는 이 논문의 논점과 무관하며, 일부는 다른 곳에서 답변한 바 있다.[각주:7]


먼저 지난 반세기 동안 모인 인류학 지식과 고고학 지식을 끌어옴으로써, 여성의 억압이 보편적이라고 주장하는 가장 흔한 주장 중 일부에 답하고자 한다. 그 뒤에 엥겔스의 기본적인 주장을 개괄한다. 세 번째로,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크리스 하먼(Chris Harman)에 매우 의존한 나의 주장을 개괄한다. 하먼은 엥겔스의 이론적 방법을 이용하여 보다 근래의 연구를 해석한 바 있다.[각주:8] 마지막으로, 최근의 고고학적 증거가 엥겔스의 상세한 역사설명에 근본적으로 도전하고 있으나, 실은 사회가 계급으로 분화되면서 여성억압이 확립되었다는 엥겔스의 중심주장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엥겔스와 하먼보다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에 더 일관된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여성억압의 기원을 설명하려 한다.




여성억압은 보편적인가?


1960년대까지 인류학자들은 여성이 항상 억압받아 왔다는 데에 거의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인류학은 과학적 연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도전받기 어려웠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을 취한 페미니스트들이 영향력이 있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는 유명한 저서 『제2의 성』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것은 항상 한 남자의 세계였다.” ”여성은 ... 남자라는 종의 사냥감이다.”[각주:9] 수잔 브라운밀러(Susan Brownmiller)는 남성이 항상 여성에 대해 폭력적이었다고 주장했고, 그녀의 주장은 1970년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매우 영향력이 있었다.[각주:10] 브라운밀러는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면서, 계급과 인종과 같은 여타 사회적 분할을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의 탓으로 돌렸다.


위계질서, 노예제, 사유재산에 관한 관념은 최초로 일어난 여성종속에서 나왔으며, 오로지 그 위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녀는 남성을 주적으로 덧칠하기만 하면 역사적 증거가 아닌 통속심리학의 추측을 받아들이는 데에 즐거워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신경을 건드린다.


가장 초기의 남성연대(male bonding)는 무리지어 사냥감을 찾아다니던 남자들이 한 여자를 윤간하는 형태였을 것이다. 이렇게 남성연대가 이루어진 이래로 강간은 남성의 특권일 뿐 아니라, 남성이 여성에게 힘을 과시하는 기본 무기이자, 여성에게 두려움을 일으키며 남성의 의지를 관철하는 주요 동인이 되었다. … 성기의 구조라는 해부학적 숙명으로 인해 인간 수컷은 타고난 포식자가 … [되었다]


위험한 거래가 그렇게 성사[되었던 것은] … 언제든 강간당할 수 있다는 공포[였으며, 그것이야말로] … 남성에 의한 여성의 본래적 종속의 유일한 인과요소였다.[각주:11]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는 다음을 발견했다. “아라페시족은 남자는 강간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해해주는 남성 본성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 점은 강간이 특정한 사회체계의 산물이며 단순히 남성의 심리적 특질의 산물이 아님을 명백히 지시한다. 하지만 브라운밀러는 어떻게 이 점이 자신의 오락가락하는 주장에서 이해될 수 있는지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각주:12]


그 이후로 풍부한 인류학 및 고고학 연구들이 이루어져 왔고, 이 연구들은 여성이 언제나 억압받은 것은 아니며 따라서 언제나 남성의 폭력을 겪지 않았다는 압도적으로 많은 증거를 제공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비(非)마르크스주의 저술가들만이 아니라, 심지어 헤더 브라운(Heather Brown)―가장 최근에 엥겔스의 저서와 마르크스의 『인류학 노트』를 깊이 다룬 연구서의 저자―처럼 (엥겔스는 아니지만) 마르크스에게 동의한다고 고백한 몇몇 이들조차 여전히 이러한 기본적인 명제를 받아들이는 데에 망설이고 있다.[각주:13]


몇몇 페미니스트들은 비인간 영장류를 연구하였고, 그들이 관찰한 것에서 인류 진화의 상과 초기사회의 모습을 추론했다. 그들은 영장류에서 진화한 최초의 사람과(―科, hominids)는 남성지배적이었으며 여성들이 폭력에 종속되었다는 주장의 어떤 증거도 없다고 결론내렸다. 브라운밀러 본인이 인용하는 제인 구달(Jane Goodall)은 야생 침팬지를 연구하면서, 암컷이 그녀에게 구애하는 모든 수컷을 받아주는 것은 아님을 밝혀냈다. 심지어 끈질긴 수컷조차 강간할 줄 몰랐다. 브라운밀러가 인용하는 레너드 윌리엄스(Leonard William)의 『남성과 원숭이』(Man and Monkey) 또한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원숭이 사회에는 강간이나 매춘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수동적 동의조차 존재하지 않는다.”[각주:14] 그러나 브라운밀러는 인간 여성은 다른 영장류와 달리 어느 시기에나 성욕이 왕성하기 때문에, 남성은 강간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함의란 원숭이와 침팬지는 육체적으로 강간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페미니스트 학자 샐리 슬로컴(Sally Slocum)은 비인간 영장류가 “심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여성이 수용적이지 않은 경우) 성교를 시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각주:15]는 점을 밝혔다. 후대의 한 연구는 유사한 관찰과 고고학과 인류학 연구들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인류 초기에 “당시의 상은 이족보행을 하고 도구를 사용하며 식량을 나누는 사교적인 어머니 중 한 명이 이러한 특성들을 또한 갖고 있는 여러 남성들과 교미하기로 선택하는 것이었다.”[각주:16]


아마 200만년이 넘는 과거에 일어난 유인원에서 사람과로 진화하는 이 첫 걸음과, 계급사회의 등장 사이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많은 격차가 존재한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약 20만년 전에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에서 나왔으며 거의 19만년 동안 그 문화가 점차 정교해지고 복잡해졌으나 어떤 억압도 없었던 평등한 공동체에서 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수렵채집 사회에 관한 인류학적 증거에 접근하기 위한 출발점은 데이터에 새겨진 편향을 인정하는 데에 있다. 이 정보를 수집한 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은 식민지 침략자와 기독교 광신도와 동행했다. 그들은 언제나 문화에 무지하고 다른 사회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들의 결론은 액면 그대로 읽을 수 없다. 압도적으로 남성이었던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적, 사회적 가치를 끌고 왔고, 이러한 가치들은 그들이 본 것, 특히 젠더관계에 관한 해석을 왜곡했다. 엘리너 버크 리콕(Eleanor Burke Leacock), 카렌 색스(Karen Sacks) 등 인류학자들은, 말리노프스키(Mailnowsky)와 레비스트로스(Lévi-Strauss)와 같은 영향력 있는 인류학자들이 내놓은 주장이 남성중심적이고 선입견 있음을 설득력 있게 증명했다.[각주:17] 나는 초기 서부 오스트레일리아 “탐험가”들의 일기에 관한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전통적인 애보리진 사회의 젠더관계는 당대 유럽인의 선입견과 예상으로 설정된 표현에 따라 상당히 이해되었다. 정적인 여성이라는 이상과, “망할 창녀와 신의 경찰(damned whores and god’s police)”이라는 병렬배치는 백인 정착을 특징짓는 가혹한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에 윤색되었고 그와 뒤엉켰다.[각주:18]


서구의 인류학자들과 다른 관찰자들은 자신의 세계관을 자신이 연구했던 사회에 놓으면서, 근대 자본주의의 핵가족이 재생산과 섹슈얼리티의 인간 조직화의 보편적 특징이 될 것이라 가정했다. 사회는 “공적”인 남성의 공간과 “사적”인 여성의 공간으로 나뉘어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의 등장과 명백히 연결되어 있는 이러한 개념은 수렵채집 사회의 삶이 지닌 평등주의적이고 협동적이며 통합적인 본성을 이해하는 데에 완전히 무용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자녀양육 책임은 그녀의 열등한 지위와 억압에 기여했기 때문에, 이 점이 모든 사회에서 여성들의 노동에 관한 의미로 읽힐 수 있다고 잘못 가정되었다.[각주:19] 심지어 많은 페미니스트 인류학자들조차 “모성에 낮은 지위를 가정했고, 그들은 모성이 활동을 제약하고 개성 발달을 가로막으며 여성의 상징적 가치를 줄인다고 보았다. 그들은 다른 문화에 우리 문화의 가치를 투사했다.”[각주:20] 주디스 브라운(Judith Brown)은 수렵채집 사회의 성별분업에 관한 가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여성의 “업무는 상대적으로 단조롭고, 완전한 정신집중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노동은 위험하지 않았으며, (아이가) 방해해도 수행될 수 있었다.” 그녀가 가정하기에, 이 점은 여성이 낮은 지위에 있음을 의미했다.[각주:21] 나는 아래에서 이러한 시각이 이미 도전을 받고 있었으며, 최근의 지식을 비추어볼 때 전혀 유지될 수 없음을 보여줄 것이다.


두번째로, 대다수 인류학의 유럽중심주의는 전자본주의 사회에 식민지 팽창이 미친 영향을 보기 어렵게 한다. 페미니스트 인류학자 라이나 라이터(Rayna Reiter)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 바 있다.


우리는 증거물과 복제품으로 구석기 시대에서 어떤 과정이 일어났는지 예측하는 것처럼 ― 칼라하리 사막의 !쿵족 부시맨, 에스키모인, 오스트레일리아의 애보리진과 같이― 현존하는 색이(foraging, 索餌)사회의 인간의 삶을 그대로 해석할 수 없다. 우리는 수천년 동안의 침투로 인해 환경의 끝자락으로 내몰려 떼죽음을 당하고 주변화된 사람들의 생활이 본래 특징을 드러낸다고 가정할 수도 없다.[각주:22]


식민지 팽창은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는 급속하여 심지어 상당히 초기에 침입했을 때 행해진 연구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한 가지를 들자면, 식민화되고 있던 사회의 일원들은 곧 생존하고 자신에 대한 공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전략을 배웠다.[각주:23] 백인이 침공하기 이전에 오스트레일리아의 토착민 여성은 열등한 재산으로 다루어 졌다고 널리 믿어졌다. 그 주장이 의존하는 보고서는 초기 정착민의 선입견을 반영하며 백인의 침입이 미친 재앙적인 효과를 무시한다. 초기의 접촉에 관한 설명 대다수는 “원주민”, 즉 원주민 남성이 유일하게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언급한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원주민과 그들의 여성을 보았다.” 탐험가들은 알아챘더라도 남성과 상대할 것이라 예상하고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았을 것이다. 상당히 초기부터 애보리진들은 여성 납치 및 강간을 겪었다. 헨리 레이놀즈(Henry Reynolds)는 1881년에 토레스 해협의 섬주민들이 백인이 나타나면 여성이 학대를 피하고자 모래에 파묻힌다는 이야기를 어느 정부관료에게 전했다며 회고하였다.[각주:24] 이 경우에 탐험가와 다른 관찰자들의 남성적 편견은 더욱 악화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애보리진 사회의 젠더관계에 관해 남성은 지배적이고 외향적인 성이며 여성은 내성적이고 순종적이며 겁이 많다고 감상하였을 것이다. 그 당시에 이 점은 남성의 중요성에 대한 과장을 강화하는 동학을 지니고 있었다. 남성 탐험가들은 남성들에게 여러 선물을 주었다. 사소하게 보일 수 있는 토마호크, 나이프, 밀가루, 설탕, 담배로 이루어진 이 선물들은 개인적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접촉이 늘어나고 침략자의 생산물이 애보리진 사이에 더욱 탐낼 만한 것이 되고 널리 퍼지면서 이러한 선물이 여남관계의 균형을 바꿀 수 있으리라 예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침략 때문에 토지가 덜 이용할 수 있게 되거나 덜 생산적이게 되었을 때, 애보리진은 백인에게 받은 식량에 더욱 의존하였다. 이 점은 여성이 남성에 독립적으로 자신과 자기 아이를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켰다.[각주:25]

리콕은 예수회 등이 캐나다의 몽타녜어-나스카피(Montagnais-Naskapi)와 북아메리카의 이로쿼이 인디언(Iroquois Indians)의 땅을 식민화하면서 평등주의적 사회관계에 행사한 압력은 위계적 사회관계와 여성억압을 일으켰다고 기록하였다.[각주:26] 그녀는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평등주의 사회의 구조는 그러한 사회에서 여성의 참여를 공적이고 자율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데에 실패한 결과로 인해 잘못 이해되어왔다. 수렵채집 사회의 군집(band)이 핵가족으로 이루어진 느슨한 집합이며 그 속에서 여성은 개별 남성에 대한 이중의 종속관계로 묶여있다고 개념화하는 것은, 수렵자/채집자에게 우리만의 사회구조가 지닌 여러 측면들을 투사하는 일이다. 그러한 개념은 사회진화에 관한 신학적이고 단선적인 관점을 담고 있으며, 그렇게 하여 우리의 사회는 모든 사회에 현존하는 관계들의 온전한 표현으로 보인다. … 수렵채집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에 관한 재해석은 질적으로 다른 관계가 존재했음을 드러낸다.[각주:27]


여성이 보편적으로 억압받지 않았다는 점에 대한 설득력 있는 몇 가지 최신 증거는 아나톨리아 반도 차탈회이위크(Çatalhöyük)의 고대유적지에 있다. 그곳은 기원전 6000년까지 1400년 동안 계속 이용되었다. 고고학적 증거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DNA 검사의 과학적 진보는 이 흥미로운 유적지에 대한 기존의 결론에 도전했다. 1994년부터 이 유적지의 수석고고학자를 맡은 이언 호더(Ian Hodder)와 그와 함께 작업한 연구팀은 사회적 차이의 척도인 여남 간의 식사량 차이를 “거의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생활방식이 있었다는 증거를 전혀” 찾지 못했다. 그리고 모든 유골이 밀폐가옥(smoke-filled houses)에서 시간을 보냈기에 갈비뼈에 잔류탄소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성이 남성보다 더욱 집에 묶여 있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내렸다. “전반적으로, 성별이 역할배분에 매우 중대했다는 증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출산과 관련된 생활방식의 차이가 있었을 것이지만, 이러한 차이가 주요한 사회적 구별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 의복이나 생활의 차이가 “한 성별이 규칙 및 자원의 전승의 측면에서도 사회적 지위와 생활방식의 측면에서도 다른 성별보다 특권적이었다”라는 점을 의미하지도 않았다.[각주:28]


상당히 많은 양의 인류학 연구는 아프리카의 !쿵족(!Kung)이나 음부티족(Mbuti)과 같은 사회에서 꽤나 최근까지도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하게 의사결정에 참여하였으며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였고 생산활동에 동등하게 기여했다는 점을 보여준다.[각주:29]


널리 확산된 이러한 증거를 내가 아래에서 더욱 덧붙일 내용과 함께 비추어 보면서, 여성억압의 기원에 관한 엥겔스의 설명으로 이제 넘어가고자 한다.




엥겔스의 주장


엥겔스는 초창기 인류가 소규모 평등주의적인 군집에 살았다고 주장하였으며, 이 군집을 “원시공산주의” 혹은 경우에 따라 “야만”, 이후에 “미개”라고 불렀다. 이 후자의 표현들은 현대의 독자들에게 거슬리겠으나 그 당시에 채용된 고고학 용어의 연장선에 있었다. 수천년 동안 인류는 집단의 필요를 부양하기 위한 새롭고 혁신적인 방법을 찾았으며, 그 노력은 개인의 육체노동이 그들의 생존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생산할 수 있을 때까지 이어졌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그 결과로] 빈부의 차이, 타인의 노동력에 대한 이용 가능성이 생기며, 따라서 계급적 적대의 기초가 점차 형성된다. 새로운 사회적 요소들은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에 낡은 사회제도를 새로운 조건에 적응시키려 하며, 결국 양자의 양립불가능성은 완전한 변혁을 가져오게 된다.


혈연적 유대에 기초하는 낡은 사회는 새로 발전한 사회계급들 간의 충돌로 말미암아 붕괴되고, 그 대신 지배권이 국가에 집중된 새로운 사회가 출현한다. 이 국가의 최소단위는 더 이상 혈연결합체가 아니다. 이 사회에서는 가족제도가 전적으로 소유관계에 의해 지배[된다]…[각주:30]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은 이러한 과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군혼(group marriage)에서부터 가족의 변화를 개괄한다. 군혼에서 여성 무리와 남성 무리는 집단 안의 모든 이들과 성적 관계를 맺는 것이 허용된다. 엥겔스는 이러한 공산주의적 가구에서 여성이 자기 자녀의 모친이라는 점은 자명하기 때문에 높이 평가되는 반면, 아버지는 쉽게 가늠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엥겔스는 대형동물의 가축화가 사회가 필요한 것 이상의 잉여를 처음으로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남성이 사냥꾼 역할에 이어 이 일을 담당했을 것이라 생각되었음을 고려할 때, 그들이 이러한 잉여생산물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 가정되었다. 그는 모권과, 가족이 아닌 여성 씨족(gen)을 통한 상속에 관한 복잡한 주장을 개괄한다.[각주:31] 여러 수단을 통해 상속의 규칙이 변화되었으며, 남성들이 새롭게 취득한 부는 남성 씨족을 통해 전달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몇몇 아메리카 인디언(American Indians)이 이행 중에 있었으며 자녀를 호칭하는 방식이 변하고 있었다는 마르크스의 연구를 인용한다. “부족들 사이에서는 자식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이전에 속해 있던 어머니 쪽이 아니라] 아버지 쪽 씨족 이름을 붙여 아버지 쪽 씨족에 편입시키는 관습이 퍼져 있었다.” 마르크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이름을 바꿈으로써 사물을 바꾸려는 것은, 그리고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충분한 동기를 제공했을 때 전통의 틀 안에서 전통을 타파하기 위한 출구를 찾으려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도학자적 근성이다!” 이 점은 상속이 새로운 사회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변화될 수 있음을 지시한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 혁명[은] 인류가 체험한 가장 근본적인 혁명 중 하나”이며, 이러한 “모권의 전복은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였다.” 또한 여성 억압이 계급분할의 등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여성은 오로지 계급분할이 끝날 때 그 억압을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이다. 엥겔스는 언제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일어났는지 증명할 수 없음을 알았으나, 그 변화가 일어났다는 증거는 많다고 자신했다.[각주:32]


그의 주장이 절대적으로 옳았음이 증명되어왔다. 점차 늘어나는 고고학 증거들과, 전(前)계급사회에 관한 인류학적에 대한 재평가는 엥겔스의 주요 명제를 강화한다. 최신의 증거는 호모 사피엔스가 20만 년 거의 대부분의 역사 동안 평등주의적인 사회에 살았음을 보여준다. 어떤 억압도 없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어느 누가 어느 집단에 대한 체계적인 차별을 부과할 수 있었던 수단은 무엇이고, 모두의 기여에 의존하는 사회에서 이 차별이 봉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잉여가 없다면 생산에 기여하도록 요구받지 않는 사회층이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착취가 없다면 공동체의 어느 일부에 가해지는 억압에 대한 물질적 기초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1980년대 후반에 연구를 하고 있었을 때 여성억압이 보편적이라고 주장하였던 여러 인류학 저널의 기고자들은 인류가 비(非)위계적이고 협동적인 사회에서 사회적 삶을 시작했다는 더욱 근본적인 주장을 타파해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인식했다. 일관된 마르크스주의자인 카렌 색스가 이야기하듯이, 유물론적 분석은 다음과 같은 이해방식에 의존한다. “인간 진화를 이끄는 보이지 않는 손이나 원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 원인은 사회조직에 외재적이고 독립적이지 않다.”[각주:33]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왜 계급의 등장이 여성억압으로 이어졌는가? 엥겔스는 그 당대에 존재하던 증거들을 연구대상으로 삼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오로지 남성만이 사냥을 했다는 지배적이지만 잘못된 관념을 받아들였다. 그는 또한 동물의 목축이 최초로 잉여를 생산했다는 고고학자들 사이에 지배적이지만 틀린 명제로 연구하였다. 그래서 엥겔스는 남성이 잉여를 담당했고 따라서 통제했다는 비합리적이지 않은 결론을 내렸다. 그가 보기에, 이 점이 가족의 권리 및 책임이라는 규칙으로 변화하여 따라서 이전의 모계중심의 가계도와 책임은 부계상속으로 대체되는 물질적 기초였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여성이 과거에 수많은 성적 파트너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통제됨으로써 자녀의 부친이 명확해야 했다.




현대적 맥락에서 본 엥겔스의 주장


그러므로 최신 연구가 보여주는 것은 무엇이고 엥겔스의 주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돌아가보자. 1960년대부터 쌓여 지금은 명확하다고 널리 받아들여진 증거는 엥겔스의 주장의 거의 모든 세부정보들이 틀렸음을 밝혔다. 그러나 그의 중심 명제는 매우 철저히 확인되었다. 즉, 여성억압은 보편적이지 않으며, 계급사회의 등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 2014년 판 『수렵채집 사회의 인류학 및 고고학에 관한 옥스포드 교과서』(The Oxford Handbook of the Archaeology and Anthropology of Hunter-Gatherers, 이하 『옥스포드 교과서』)의 편집자 중 두 명인 옥스퍼드 피터 조던(Peter Jordan)과 비키 커밍스(Vicki Cummings)는 부상하여 널리 받아들여진 합의를 요약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소규모의 수렵채집 공동체는… 십중팔구 사회지위의 두드러진 차이를 결여한 평등사회였으며, 사적인 부나 위풍재(prestige objects, 威風財) 축적의 존재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는 별로 없었다.[각주:34]


심지어 몇몇 공동체가 잉여를 생산할 수 있게 된 뒤에도, 소수의 착취계급이 등장한 국가에 지탱되기까지 수만 년이 걸렸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이 일어난 과정은 엥겔스와 오늘날 여전히 많은 이들이 설명했던 방식과 매우 달랐다. 이제 몇몇 고고학자들은 대규모 정주인구, 사회경제적 불평등, 노예제, 수공업의 전문화 등 이전에 완전히 정착한 농경사회와 결부되었던 기술적, 사회적 특징들이 생각보다 훨씬 이전에 있는 많은 공동체에서도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발전은 유럽에서 4만년 전보다 이르게 시작했고, 다음 2만년 동안 세계의 많은 부분으로 퍼졌다. 『옥스포드 교과서』에 기고한 브라이언 헤이든(Brian Hayden)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문화적 발전에 주요한 분수령은 식물의 재배나 동물의 가축화가 아니라, 처음으로 수렵자와 채집자 사이에 등장했던 더욱 복잡한 사회의 등장이었다.”[각주:35]

그 증거들은 흩어져 있고, 고고학 장소가 어디인지에 의존한다. 그러나 우리는 구석기시대의 마지막 빙상이 녹았을 때 질적 발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얼음이 녹아 강이 굵어지고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동물들은 강변과 해변을 따라 번성했다. 그로 인해 어류, 비옥한 토양, 좋은 강우량 등 풍부한 자원을 지닌 새로운 생태계가 만들어졌고, 유목 공동체가 더욱 영구적으로 혹은 적어도 계절적으로 정착하도록 촉진했다. 우리가 아는 한에서, 이러한 발전은 일본 북동부 해안과 우크라이나에서 처음 일어났고, 그 뒤에 미국의 북서부 해안, 아나톨리아 반도, 오스트레일리아, 동남아시아의 여러 강변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이 당시를 알고 있는 한에서, 아프리카에서 먼 거리를 이동해온 인류는 지구 전역에서 불태우고, 토양을 일구며, 잡초를 제거하고, 식물을 심으며, 씨를 뿌리고, 땅에 물을 대거나 빼는 실험들을 점점 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인간노동의 생산성 증가에 점차 기여하고 있었다.[각주:36] 이러한 사회는 색이 및 사냥 생활을 유지하였으나, 가뭄 등 어려운 시기를 위해 잉여를 생산하기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사회는 평등하고 집단적인 공동체로 남아 있었다.


애보리진 문화가 완전히 파괴되기 이전에, 오스트레일리아 침입을 주도한 최초의 “탐험가”나 애보리진 땅에 소유권을 확립한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토착민들이 분명하게 당장 필요하지 않은 상당분량의 곡식을 생산했다고 보고했다. 전형적인 설명에 따르면 노던 준주(Northern Territory)의 핑크(Finke) 강에 “원주민 곡창”이 있다고 기술되었다. 지면에서 3미터 위에 나무에 지어진 단상에는 곡식 주머니들이 있었다. 노던 준주에 관한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나무껍질로 둘러싸인 나무그릇에 많은 곡식이 저장되어 있었다. 뉴사우스웨일즈(New South Wales) 주 중부에서는 캥거루 주머니가 곡식으로 가득했다고 기록되었다. 유럽인들은 이러한 행동을 설명할 수 없었다. 왜 어느 누구도 영양 풍부하고 맛있는 곡물 저장고를 지키지 않은 채로 그대로 두고 있는가? 그들에게 오로지 문명화된 정주민만이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애보리진 공동체는 반(半)정주 공동체였고, 그들이 특정 구역의 토지를 경작하거나 관리할 동안 살 집을 가끔씩 만들었다. 그들은 토지를 가로질러 걸어 돌아왔을 때 저장고는 그대로 있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저장고를 내버려 둘 수 있었다. 계급사회 출신의 사람들은 쉽게 포착할 수 없는 것이었다.[각주:37]


헤이든의 결론은 사회적 변화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설명과 상응한다. “한편으로 자원생산성 및 잉여생산, 다른 한편으로 사회정치적 복잡성 사이에 중요한 관계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각주:38]


그러므로 초기 사람과에서 수백만 년 전에 걸쳐 초기 사람과에서 진화한 ―이제는 초기의 가정과 달리, 복잡한 사회적, 문화적 실천을 해온 네안데르탈인과 이종교합한 것으로 알려진― 이 동물들은 적어도 15만년 뒤에 사회의 필요를 생산하는 이들과, 다수의 노동에 의존해 살아가는 소수파로 나뉘어지기 시작한다. 엥겔스가 말하였듯이,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는 한번의 사건이 아니었다. 엥겔스는 고고학자들이 끌어낸 최신의 결론들을 쉽게 받아들일 것이고, 이는 그 결론들이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접근과 매우 분명하게 합치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가 언제나 항구적인 변화과정 속에 있다고 이해했다. 생산이 일어나는 방식의 작은 변화들은 누적되면서 점차 사람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실제로 엥겔스는 이러한 변화가 수천 년에 걸쳐 일어났으며 그렇기에 변화의 장기적인 결과는 어느 개인에게도 분명하지 않을 수 있다고 논평했다. 약 8,000~10,000년 전에 지배계급과 국가가 확립되기 전까지 수천 년이 걸렸을 것이며, 이 점은 인간들 사이의 착취와 억압은 전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님을 강조한다.


나는 1980년대에 증거를 살펴보기 시작한 뒤 엥겔스의 설명의 여러 측면들에 불편하게 느꼈다. 엥겔스의 설명은 그를 폄하하든 옹호하든 누구도 다루지 않았던 핵심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모든 가족이나 혈통집단(lineage)이 하나의 지배계급이 된다면, 그 계급에서 여성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러한 발전을 겪고 있는 사회는 평등주의적이었고, 그 속에서 여성과 남성 모든 일원들이 중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했다. 그렇다면 그 사회계층의 여성들은 왜 남성이 통제권을 쥐도록 그저 내버려 두었는가? 그녀들이 이러한 변화의 일부를 시행하거나 저항하는 데에, 그리고 두 경우 모두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신뢰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점에서 독창적인 것은 아니나 이전에 어느 누구도 주장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설명을 개괄하고자 한다. 바로, 여성이 여성 자신의 체계적인 억압으로 이어진 계급분할의 발전에 적극적인 참여자였다는 인정하는 것이다.




진화하는 논쟁과 증거


먼저 지난 40년 동안 페미니스트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 일어난 몇 가지 유의미한 주장과 논쟁을 요약하는 것이 좋겠다. 1970년대에 몇몇 페미니스트들은 수렵채집 사회의 남성지배를 가정하는 설명들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몇몇은 위에서 언급했지만, 이 중 최고의 설명은 여성들이 채집자로서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 점이 남성과 동등한 위치를 부여했음을 밝혀냈다. 카렌 색스가 전형적인 사례이다. 그녀는 몇몇 수렵채집 사회에서 여성들이 생산에 필요한 출산의 수를 조절하였다고 보여주었다. 색스는 아프리카의 !쿵족 여성들이 아이를 기르는 동안 채집활동을 쉬지 않았음을 드러내었다. 그녀가 썼듯이, 이것은 ”여성의 생산적 역할에서 문화가 중심적임을 증명할 뿐 아니라 단순한 재생산 결정론을 논박하고 있다.”[각주:39]


이 연구들은 매우 유용했으며, 여성억압의 기원을 반드시 역사적인 사회발전 속에서 보아야 한다는 점을 확립시켰다. 그러나 이 연구들은 남성이 수렵자이며 여성이 채집자라는 이미지를 강화시켰고, 단지 여성이 초기 사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로 인해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있게 되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그 이미지를 개작했을 뿐이었다. 가장 최근에는, 여남 간의 공고한 노동분업이 있었다는 가정이 도전을 받았다. 페미니스트 고고학자 로즈마리 조이스(Rosemary Joyce)는 몇몇 고고학자들이 연구자의 가정들이 너무나도 자주 “현재의 방식으로 과거를 보는 데에 갇혀 있”으며 젠더가 “영원하며, 여타 사회적 차별보다 중요하다”라고 가정하는 것은 틀렸음을 깨닫기 시작했다고 논평했다. 그녀는 또한 유해의 DNA 분석기술의 진보가 일상적으로 하고 있던 복장이나 담당과 연관시켜 젠더를 판명하는 일은 그릇되었음을 밝혔다는 점을 보여주었다.[각주:40] 두 명의 민속고고학자들 또한 『옥스포드 교과서』에 다음과 같이 쓰면서, 성별분업에 관한 오래된 가정에 강력히 도전했다.


실제적이고 현장에 근거한 연구들은, 한 개체군 안에도 여러 개체군 사이에도 노동분업이 흔히 가정되었던 것보다 매우 가변적이면서 유동적임이 밝혀졌다. … 노동분업은 젠더만이 아니라 가끔씩 연령, 능력, 경험의 구별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모든 크기의 동물들 대부분을 “여성 역시 사냥을 했다는 단순하고도 부인하기 어려운 현실을 기록한 민속지 문헌이 늘어나고 있다.” “노동영역은 종종 젠더의 구별에 따라 나뉘는 것으로 보이지만, 남성과 여성의 활동 및 노동영역이 광범위하게 뒤섞여 있거나 혹은 노동과 공간의 조직화가 젠더가 아닌 다른 구별에 따른다는 증거 또한 충분하다.” 그들은 고고학적 출토품에서 여성과 남성에게 도구 및 기구를 배치하는 것은 쉽게 연구자의 편견을 반영할 수 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사례는 조이스가 기록한 바 있다) 하지만 중요하게는, 그들은 포획과 살해의 계기를 강조하는 것이 오해를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한가지를 들자면, 구덩이, 올가미 등 여러 구조물들은 사냥에 내재한 위험과 어려움을 완화시켰다. “조달기술과 전략의 전체 목록표는 의심할 바 없이 여성과 남성, 아동의 상보적인 노동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포획에 수반되는 일들에 충분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식량, 의복, 기구, 실을 준비해야 하고, 그 중 많은 것들은 여성이 임신이나 수유 중일 때에도 할 수 있었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 점에서 더 나아가, 누군가는 많은 여성들이 생가죽과 정교하게 무두질된 피혁, 내장, 모피옷을 만들었으며 그로 인해 수렵채집 개체군이 추운 환경에서 생존하고 노동할 수 있게 하였다고 쓸 수 있다. 여성의 “주변화”와 남성의 “높은 특권”에 관한 안일한 주장은 그러한 실제 행태와 마주하면서 사라져가고 있다. …


여기서 핵심적인 쟁점은, 남성들이 중추적인 경제문제 중 몇 가지 활동에서 무시해도 될 만한 정도거나 제한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을지라도, 이러한 제한은 전혀 인식되지도 성별분업에 관한 견고한 생각을 고치는 데에 이용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반대로 … 전문가들은 여성의 협소화와 배제라는 점에서 본 수렵채집 사회의 역사를 알고 있을 뿐이다.[각주:41]


그러므로 반복하자면, 이 증거는 남성이 동물 가축화로 발생한 잉여를 자동적으로 통제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최초의 잉여는 아마도 채소류나 과일류, 곡류의 수확 혹은 어로 또는 그 모든 활동, 즉 이견없이 여성이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활동이 더 많은 산출한 결과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주장하듯이 남성지배는 무거운 쟁기의 사용으로 설명될 수 없다. 계급사회와 여성억압은 무거운 쟁기가 도입되기 이전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등장했기 때문이다.




엥겔스를 넘어서


여성억압이 어째서 계급사회에 필수적인지 설명하려면, 우리는 생산의 객관적 발전과 그것이 야기한 사회적 관계의 변화 간의 관계를 밝혀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에는 어떻게 재생산이 재구조화되었는지도 포함한다.


수렵채집민과 어로자는 잉여를 생산할 수 있는 곳에 적어도 계절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대체로 평등주의적이었다. 잉여의 통제는 신뢰할 수 있는 개인이나 집단에 분배되었고, 아마도 종교적 인물이었을 것이다―그 중에는 여성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들은 호혜적 책무에 관여하고 점점 복잡해지는 생산기법을 조율하며 필요한 자원을 저장하고 분배하는 등 사회적으로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잉여를 책임진 이들이 높은 지위와 추가적인 부에 접근할 수 있었겠지만, 수천 년 동안 이 점은 그들에게 국가라는 강압적 권력에 뒷받침되는 과도한 권력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이 변했고 그 결과로 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유랑하는 수렵채집민 사이에는 어떤 여성도 한번에 두 명 이상의 아이를 담당하지 않았고 따라서 생산을 중심으로 여성은 분만과 거리를 둘 수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반대로 더욱 정주하게 된 사회에서, 아이들은 잠재적으로 추가적인 생산자이다. 또한 전염병에 상당히 취약한 결과인 높은 사망률과, 저장된 자원을 놓고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에 인구를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출산율이 높은 사회일 수록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여성이 (전쟁이나 장거리 여행, 이후에는 중농업 업무와 같은) 여러 활동에 참여하여 사망하거나 불임 혹은 유산될 막대한 위험부담에 노출되지 않는 편이 ―혹은 모유에 의존하는 아이를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는 편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렵채집 사회에서도 초기 농업사회에서도 생산만이 아니라 재생산에서 중요했던 여성의 역할은 점차 변화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생산의 몇몇 측면에서 배제되었다. 인류학자 어네스틴 프리들(Ernestine Friedl)은 남성이 교역 때문 먼 거리를 이동하고 전쟁에 참여했던 원예농업사회(horticultural societies)에서, 남성의 지위가 여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승한다는 증거를 찾았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과정에서 여성이 의사결정권자였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러한 경로로 내려가는 모든 발걸음은 작았고 점점 늘어났다. 엥겔스가 강조했듯이, 개인들은 그 장기적이고 누적적인 효과가 무엇이 될 것인지 알 수 없다.


이언 호더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차탈회이위크― B.C. 7,400년부터 6,000년 사이에 1,400년 동안 지속되었던 무계급 정주공동체―에서 여성이 유랑사회보다 더 많은 아이들을 낳도록 하는 유인책(혹은 단지 그렇게 했을 가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성 역할은 폭넓은 사회 변화의 일부로서 더욱 구획되어 갔을 수 있다 … 남성과 여성은 점점 전문적인 직무 및 구역과 관련되기 시작했을 지도 모른다.”[각주:42]


그러므로 여성이 더 많은 아이들을 낳고 생산활동의 몇몇 영역에 불참함에 따라, 토지와 여타 생산수단에 결부된, 연속세대의 남성 간의 관계가 새롭게 강조되었다. 하먼이 결론내렸듯이, “부계제(patrilineality)와 부처제(patrilocality)가 모계제와 모처제보다 생산의 논리의 훨씬 더 잘 들어맞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이제 헤이든이 썼듯이 이렇게 매우 평등주의적인 수렵채집민이 풍요로운 영역에 정주하면서 이러한 과정이 시작되는 것을 경험했으리라고 말할 수 있다. 엥겔스는 그렇지 않았지만 하먼이 기록했듯이, 중요한 것은 모든 남성이 아니라 부상하던 지배집단의 남성들만이 잉여의 통제권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집단이 착취자의 사고방식을 발전시키려면, 그들은 사회 전체의 이해가 자신들이 생산을 통제하는 것임을 특정하기 시작해야 했을 것이다. 필연적으로 그들은 자신이 억압적 관계를 도입한다고 반드시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점에서 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대개 받아들이는 엥겔스나 하먼의 설명에서 벗어나려 한다.


지배집단의 여성들은 혈통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 무관하게 다음에 대해 동의했을 수 있다. 자신의 가계혈통은 자기 혈통이 담당하는 부를 계속 통제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배집단의 남성이 자신이 통제하는 부를 생산하고 관리할 책임을 넘겨주고자 자녀의 부친임을 분명히 하길 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찬가지로 이 남성과 연관된 여성도 그렇게 하길 원할 수 있다. 변화되어가는 사회에서 여남 모두 중요한 의사결정에 기여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음을 고려한다면, 등장하던 지배집단 내부에서 오로지 남성만이 발언권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설득력 있지 않다.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도 상속계보를 변화시키는 데에 이해를 갖고 있다. 여성의 역할이 변화한 이유는 단순히 잉여가 남성이 통제하던 목축으로 인해 발생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출생 수가 늘어나면서 잉여의 생산 및 관리에 대한 상속 및 책임이 남성의 계보를 따라 내려오는 것이 이치에 맞았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가혹한 규칙의 시행이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으나, 그의 주장은 진지하게 관심을 받지 못했고 그렇기에 이러한 가능성에 대한 증거는 고려되지 않았다. 확실히 기원전 1717년 경의 악명높은 함무라비 법전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왕의 이름을 따왔으며, 메소포타미아의 새로운 계급사회에 있던 법들에 기반을 두었다― 일부일처제를 위반한 여성은 사형당하며 여성이 복종에 저항할 경우 “반드시 그녀의 치아를 구운 벽돌로 깨뜨리도록 한다”는 규칙을 기록하였다. 법전은 “특정 위법행위에, 특히 가족의 성스러움에 반하는 위법행위에 더욱 가혹한 처벌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함무라비 법전의 존재는 여성을 억압하려는 시도가 적어도 가끔씩 저항과 마주했으며 그 저항은 결국 무자비한 물리력으로 분쇄되었음을 드러낸다.[각주:43] 더욱 계급의식적인 몇몇 여성들은 자기 집단의 반항적인 일원에게 성적 행위에 대한 그와 같은 통제를 부과하는 데에 참여했을 수 있다.


이러한 사회 재조직의 가장 극적인 결과가 여성억압이라 할지라도, 그 결과는 신출내기 지배자에게도 피지배자에게도 분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엥겔스가 주장하듯이 이러한 발전은 수천년은 아니지만 수백년에 걸쳐 일어났고, 그로 인해 일어난 많은 변화들 중 다수는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사회의 생산력의 주된 변화가 수천년 동안 발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삶의 격변도 그러하였다. 여성들이 억압받지 않아왔기에, 어느 누구도 그러한 파괴적인 결과를 예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계급구조 및 국가구조의 장기적 진화에 관한 이 주장은 매끄럽고 목적론적인 과정으로, 즉 너무나도 매끄럽게 보일 수 있다. 부상하던 지배집단이 저항과 마주했을 수 있다는 증거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잉여를 관리하는 자신의 권한을 유지하고자 공동체 일원의 의무 및 권리를 명문화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지배집단이 더욱 통제하게 되면서 그들의 지위는 규칙과 법률에 의해 점점 견고하게 되었고 그러므로 사회의 요구는 변화했다. 점차적으로 지배집단에 대한 어떤 도전이든 그들 개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범죄가 되었을 것이다.


기원전 10,000년부터 7,000년까지 수천 명이 살았던 아나톨리아 반도의 수 많은 신석시시대 마을은 수렵과 채집에 의존하는 평등한 사회였다. 그러나 이 마을은 점차 위계질서의 징조를 드러내고 있었다. 기원전 9,600~8,000년까지 존재했던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는 주택이 없는 의례중심지라고 생각된다. 이 유적은 종교 엘리트가 존재하며 그들의 특권이 넓은 지역에 미쳤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발전하고 있던 위계질서가 저항을 받았다는 증거도 있다. 이 유적지 발굴에 참여한 터키의 고고학자 메메트 외즈도안(Mehmet Özdoğan)은 약 B.C. 7,200년에 차외뉘(Çayönü)의 엘리트를 전복하는 사회혁명이 있었고 그 뒤에 주변 지역에서 비슷한 혁명적 격변이 일어났다고 믿는다. 그는 2011년에 내게 쓴 이메일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저는 [그 시기에] 차외뉘만이 아니라 신석기시대 아나톨리아 반도의 핵심지역 대부분에서 일종의 사회적 격동이 있었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합니다.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의 신석기시대 사회를 연구한 베른하르트 브로시우스(Bernhard Brosius)도 이 점에 동의한다.


9,200년 전 어느 날, 영주의 집이 불타버렸다. … 사원은 무너져 불타버려, 도시의 쓰레기더미로 변해버렸다. 서쪽의 빈민촌은 영원히 사라졌다. … 새로운 차외뉘가 건립되었다. 열악하게 지어진 집이나 오두막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 사회적 차이에 관한 모든 실마리는 지워졌다.[각주:44]


그는 이 저항이 차탈회이위크의 무계급사회가 적어도 1,000년 동안 지속된 전통을 갖도록 야기했다고 주장한다.


제임스 C. 스콧(James C. Scott)은 저서 『결실을 거스르며』(Against the Grain)에서 메소포타미아 초기국가의 역사에 관한 증거를 요약한다. 많은 초기국가의 붕괴에 관한 고고학자들의 가장 일반적인 설명은 언제나 기후변화, 환경악화, 인구압력이었다. 스콧은 불법적인 반란이 아니라면 국가의 징세 및 통제에 복종하지 않는 주변 공동체로의 도주가 초기국가의 쇠락에 기여한 요인임을 암시한다. 도시 장벽은 약탈하는 “야만인”을 바깥에 머무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흔히 생각되었지만, 사람들을 안에 머무르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는 고고학자들도 존재한다.[각주:45]


지배집단이 재발하는 저항을 마주하여 자신들이 지닌 권위와 사회에 대한 통제권을 드러내려 노력하면서,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가 시행되어야 했다. 이 점은 그들이 자신과 자기 후예들이 사회의 잉여의 소유자라는 지위를 견고히 하려는 데에 대단히 중요했다.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도 평등주의를 전복하려는 이 모든 절차에 저항했다. 그러면서 점점 탄압의 순환은 엥겔스가 생각했듯이 여성이 “순전한 산아도구”가 되는 데에 이르렀다.[각주:46]


여성들이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를 주장하는 지배집단과, 이 통제가 수반하는 일부일처제와 이성애와 같은 강제적인 제약을 확립하는 데에 참여했을 것이라 상상하기 어렵다면 그리 멀지 않은 알려진 역사를 살펴보자. 역사 전반에 지배집단의 여성은 여성에 대한 착취 및 억압에서 수혜를 입었고 착취와 억압을 실시하여 왔다. 현대에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 지나 라인하트(Gina Rinehart)와 같은 인물들은 이 논점을 역설한다. 화장품회사 로레알(L’Oréal)의 상속인인 프랑수아즈 베탕쿠르 메이예(Françoise Bettencourt Meyers) 역시 마찬가지이며, 그녀가 지닌 439억 달러의 부는 여성들이 우리의 외모에 강박관념을 갖게 하고 우리의 분노로 먹고사는 산업에서 나온 것이다. 미국의 대형할인마트 월마트(Walmart)의 재산을 상속한 앨리스 월튼(Alice Walton)은 대부분 여성인 노동자들에게 보잘것없는 임금을 지불하여 466억 달러를 축적했다.


이 여성들은 체계적인 차별을 정당화하고 심지어 자기집단에서 자기자신에 대한 차별도 정당화하는 편견을 촉진하여 자기 계급의 권력과 특권을 유지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여성들은 이 새로운 체제를 시행하는 데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억압을 경험하지만 그들의 계급적 지위 덕분에 권력과 부에 접근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접근가능성은 자기 계급이 착취하는 이들의 계급억압과 젠더억압 양자를 유지시키는 데에 의존한다.


또한 오늘날의 대부분 ―모든 사회계급 출신의― 여성은 오늘날의 여성억압을 일정정도 시행하거나 강화 혹은 영속화하는 데에 일부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주로 어머니들은 여아에게 성차별주의적인 사회의 규범들을 심어주고, 종종 가족과 체면 등 사회적 가치들을 매우 강력히 옹호한다. 피억압자가 자동으로 자신들의 억압이 표현되는 방식에 반대하거나 저항하고 혹은 그것을 의식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장했듯이, 한 사회의 사상은 언제나 지배계급의 사상이다. 그러므로 지배집단이 여성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러한 생각을 피억압자에게 꽤 자연스럽게 심을 것이다. 이 점은 피착취 남성이 늘어나는 잉여 비중을 만들어낼 수 있으나 여성은 착취될 미래의 노동자인 더 많은 아이들을 낳도록 장려되고 있는 사실이 뒷받침한다.




결론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에서 인간은 ―그들에게 필수적인 의식주를 생산하는― 행동함으로써 자신을 변화시킨다고 주장했다. 점진적인 누적적 변화가 이러한 생산수단을 둘러싼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생겨나게 하여, 오래된 사상과 사회관계에 도전한다.


엥겔스의 세세한 내용은 완전히 그릇되었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얇은 보고서 이외에 초기 사회의 수렵채집민에 관해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엥겔스가 읽은 연구들이 다룬 아메리카 원주민은 이미 식민지 점령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게르만 족이 로마 제국을 침공했을 때 일어난 여러 변화를 논의한다. 하지만 그 사건은 착취, 국가, 여성억압으로 이행을 일으킨 초기 사회를 알고자 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다. 사건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모든 것은 엥겔스가 추론해낸 실마리이며, 그 실마리는 어떻게 더 넓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시간이 지나게 됨에 따라 가족구조가 변화할 수 있었는지에 관한 몇 가지 증거를 제공한다.


사실 우리가 최신 연구로 돌아가면, 엥겔스의 여러 주장은 인류 발전에 관한 엥겔스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기원』을 썼을 당시보다 오늘날에 더욱 분명히 입증되었다. 그는 여러 변화가 자녀의 부친을 명확히 하기 위한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를 포함하였다는 점을 올바르게 요약했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의 재생산이라는 생물학적 필요성과, 변화하는 사회적 생산관계 간의 상호작용에서 일어났다―하지만 엥겔스만이 아니라 그 문제에 관해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들이 아직까지도 설명하는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다수의 노동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새로운 지배계급에 의한 잉여의 통제가 규범이 되려면, 필연적으로 여남 다수에 가해지는 억압이 되어야 했다. 지배엘리트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자기계급의 재산상속을 보장하기 위하여 새로운 통제에 종속되었다. 시간이 지나 여성의 불평등은 모든 계급에서 견고해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불평등은 여성의 “본성”과 특히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관한 새로운 억압적 사고를 남성에 대한 편견 또한 도입하는 방식으로 등장했다. 이러한 억압이 유지되어온 방식은 상이한 여러 계급사회마다 다양했다. 하지만 억압은 그것을 둘러싼 문화적 겉치장이 무엇이든 간에 유지되어 왔다. 계급의 등장, 국가의 성립, 여성억압은 전혀 순탄하게 이루어진 불가피한 과정이 아니었다. 엥겔스가 이 과정을 폭넓게 기술하면서 명확히 하였듯이, 그 과정은 저항과 소동의 가능성으로 가득하였다. 이 점은 헤더 브라운과 같은 이들이 엥겔스의 설명을 선형적이고 비변증법적이라고 일축했던 것과 반대된다.


혈연적 유대에 기초한 이 사회구조 속에서도 노동생산성은 계속 증대된다. 이와 함께 사적 소유 및 교환, 빈부의 차이, 타인의 노동력에 대한 이용가능성이 생겨나며, 따라서 계급적 적대의 기초가 점차 형성된다. 새로운 사회적 요소들은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에 낡은 사회구조를 새로운 조건에 적응시키려 하며, 결국 이 양자의 양립불가능성은 완전한 변혁을 가져오게 된다. 혈연적 유대에 기초하는 낡은 사회는 새로 발전한 사회계급들 간의 충돌로 말미암아 붕괴[된다]


그 대신 지배권이 국가에 집중된 새로운 사회가 출현한다. 이 국가의 최소단위는 더 이상 혈연결합체가 아니라 지연결합체이다.[각주:47]


마르크스주의자와 페미니스트의 의무는 최신의 과학적 결론에 근거하여 엥겔스를 옹호하거나 틀렸음을 밝히는 것이다.


모두가 가정했던 명백한 성별 노동분업은 더 이상 초기 인류공동체에서 실행되었다고 평가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남성은 동물 가축화로 형성된 잉여를 곧 장악하지 않았다. 우선 첫번째로, 많은 곳에서 초창기 잉여가 생산되는 과정이 목축보다 선행했고, 잉여생산은 그저 대형동물의 가축화보다 더욱 다면적이고 복잡한 과정의 결과였다. 차탈회이위크 유적지에서, 비료를 저장했던 정착촌에서 목축이 일어났다는 증거는 없으며, 이 점은 적어도 몇몇 잉여가 다른 수단에 의해 생산되었음을 지시한다. 그리고 나는 소비를 위해 가축화된 동물이 없었던 반유랑 공동체에서도 잉여가 있었다는 다른 증거를 언급한 바 있다.


두번째, 그저 남성이 어려운 시기를 위해 저장되었을 부를 통제하지 않았다. 신임받는 가족이나 혈통집단, 혹은 아마도 여성일 수도 있는 종교 지도자가 자발적으로 잉여를 관리하고 분배할 책임을 받았다. 처음에 이 점은 전혀 과도한 권력을 수반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부와 권력을 지닌 소수의 지배에 기초를 놓았으며, 그들은 점점 부와 권력을 일종의 국가기구를 통해 보호하였다.


세번째, 부상하던 지배집단의 여성은 남성만큼이나 권력과 특권을 얻었다. 여성은 집단적인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데에 익숙했다. 그렇기에 여성이 공동체를 다스리는 규칙들을 변화시키는 데에 수행했을 역할을 무시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이 규칙들 중에는 점점 견고해지며 잉여를 통제하는 소수파의 여성이 지닌 섹슈얼리티에 대한 새로운 통제권을 시행하는 것을 포함한다. 지배계급이 확립된 뒤, 그들의 일부일처제 이데올로기는 다수에게 도입되어야 했다. 이 점은 자본가들의 개인주의적 경쟁 이데올로기가 자기 엘리트집단을 지배할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규범으로 선전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배계급의 최종적인 승리는 엥겔스가 이야기했듯이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였으나 마찬가지로 인류의 압도적인 다수의 극적인 패배이기도 했다. 엥겔스가 논평하듯이, 이 지배집단을 보호하고자 국가가 확립되자 그 이후로 ―생산의 개선과, 과학, 저술, 문화의 발전 등― 인류가 일으킨 모든 진전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압도적인 다수를 희생하여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들에게 해방이란 모든 계급구조가 파괴될 때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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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논문은 사회주의 대안(Socialist Alternative)에서 많은 여성 및 남성 동지들에 의해 이루어진 여성억압에 관한 십년 간의 논의를 통해 거의 만들어졌다. 특히 믹 암스트롱(Mick Armstrong)과 루이스 오시어(Louise O’Shea)는 여기서 요약된 주장을 개진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본문으로]
  2. Engels, Frederick (1972), The Origin of the Family, Private Property and the State, International Publishers, p. 113. (국역본: 프리드리히 엥겔스 (2012), 김대웅 역,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두레, 79쪽) [본문으로]
  3. Sacks, Karen (1982), Sisters and Wives. The past and future of sexual equality,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p. 104. [본문으로]
  4. Lerner, Gerda (1987), The Creation of Patriarchy, Oxford University Press, p. 23. (국역본: 거다 러너 (2004), 강세영 역, 『가부장제의 창조』, 당대, 44쪽) [본문으로]
  5. 이 모든 글은 Marxists Internet Archive에서 찾을 수 있다. http://www.marxists.org. [본문으로]
  6. Engels, Frederick (1972), The Condition of the Working Class in England, Progress Publishers, p. 163. [본문으로]
  7. 『기원』 출간 100주년 기념 심포지움에 논문을 기고한 여러 비판자들에 관해서는 다음을 보라. Sayers, Janet, Mary Evans and Nanneke Redclift eds (1987), Engels Revisited: new feminist essays, Tavistok Publications. 그리고 그 논문 중 일부에 대한 나의 답변은 다음을 보라. Bloodworth, Sandra (2010), “Marx and Engel on women’s oppression and sexuality and their legacy”, Marxist Left Review, 1, Spring, pp. 76-79. [본문으로]
  8. Harman, Chris (1994), “Engels and the Origins of Human Society”, International Socialism, 65, Winter. [본문으로]
  9. de Beauvoir, Simone (1987 [1949]), The Second Sex, Penguin, pp. 93 and 97. [본문으로]
  10. Brownmiller, Susan (1986), Against Our Will. Men, Women and Rape, Penguin. (국역본: 수잔 브라운밀러 (2018), 박소영 역,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 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의 역사』, 오월의봄) 브라운밀러의 책에 대한 나의 비판은 다음을 참고하라. Bloodworth, Sandra (1992), “Rape, Sexual Violence and Capitalism”, Socialist Review, 5, Autumn. [본문으로]
  11. Brownmiller (1986), pp. 11-18. (국역본: 25~28쪽) [본문으로]
  12. Brownmiller (1986), p. 284. (국역본: 438쪽) [본문으로]
  13. Brown, Heather (2012), Marx on Gender and the Family. A Critical Study, Brill, pp. 170-173. 브라운의 저서에 대한 훌륭한 서평을 찾는다면 다음을 보라. McGregor, Sheila 2015, “Marx Rediscovered”, International Socialism, 146. 맥그리거는 엥겔스에 반대하는 브라운의 모든 주장이 대부분 틀렸음을 입증했다. 그녀는 또한 브라운이 매우 의존하는 라야 두나예프스카야(Raya Dunayevskaya)의 약점과 오류를 개괄한 바 있다. 브라운은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생각을 올바르게 제시하지 않았다는 두나예프스카야의 주장에 매우 의존하고 있다. [본문으로]
  14. Brownmiller (1986), p. 13. (국역본: 23쪽) [본문으로]
  15. Slocum, Sally, “Woman the Gatherer: Male Bias in Anthropology”, in Reiter, Rayna R. ed. (1975), Toward an anthropology of women, Monthly Review Press, p. 44. [본문으로]
  16. Tanner, Nancy and Adrienne Zihlman (1976), “Women in Evolution. Part 1: Innovation and Selection in Human Origins”, Signs, 1 (3), Spring. [본문으로]
  17.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비판에 관해서 다음의 책 중 11장과 12장을 보라. Leacock, Eleanor Burke (1981), Myths of Male Dominance, Monthly Review Press. 다음의 책도 살펴보라. Sacks (1982), pp. 1-67; Dahlberg, Frances ed. (1981), Woman the Gatherer, Yale University Press. [본문으로]
  18. Bloodworth n.d. [본문으로]
  19. Moore, Henrietta L. (1991), Feminism and Anthropology, Polity Press, pp. 38-41. [본문으로]
  20. Dahlberg (1981), p. 21. [본문으로]
  21. Brown, Judith K. (1970), “A Note on the Division of Labour by Sex”, American Anthropologist, 72, p. 1074. [본문으로]
  22. Reiter, Rayna Rapp (1977), “The Search for Origins”, Critique of Anthropology, 3 (9/10). [본문으로]
  23. 다음은 선교사, 탐험가, 교역상의 보고서와 다른 역사자료를 끌어와 12개의 사회에 식민지배가 미친 영향을 기록한 바 있다. Etienne, Mona and Eleanor Burke Leacock (1980), Women and Colonization: Anthropological Perspectives, Praeger. [본문으로]
  24. Reynolds, Henry (1981), The Other Side of the Frontier, James Cook University, p. 145. [본문으로]
  25. Bloodworth n.d. [본문으로]
  26. Leacock, Eleanor Burke (1978), “Women’s Status in Egalitarian Societies”, Current Anthropology, 10 (2), June; Leacock (1981). [본문으로]
  27. Leacock (1978), p255. [본문으로]
  28. Hodder, Ian (2006), The Leopard’s Tale. Revealing the mysteries of Çatalhöyük, Thames and Hudson Ltd., p211. [본문으로]
  29. 다음을 보라 Sanday, Peggy Reeves and Ruth Gallagher Goodenough eds (1990), Beyond the Second Sex. New Directions in the Anthropology of Gender, University of Pennsylvania. [본문으로]
  30. Engels (1972), p72. (국역본: 9쪽) [본문으로]
  31. “씨족”의 용법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했다. 엥겔스는 씨족을 직접적인 “가족”보다 더욱 넓은 집단을 의미하는 데에 썼으며, 공동조상의 후손들이 어머니를 따라 이어진 동일한 이름으로 연합하였다고 주장했다. 이후에 씨족은 고대 로마의 가족의 가부장적 분류법을 언급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본문으로]
  32. Engels (1972), pp. 112-120. (국역본: 93~94쪽) [본문으로]
  33. Sacks (1982), p. 10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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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Robinson, Jennie, “The First Hunter-Gatherers”, in Cummings et al eds (2014), p. 600. [본문으로]
  37. Gammage (2012), Chapter 10, “Farms without fences”, pp. 281-304. [본문으로]
  38. Hayden, “Social Complexity”, in Cummings et al eds (2014), p. 646. [본문으로]
  39. Sacks (1982), pp. 70-71. [본문으로]
  40. Joyce, Rosemary A. (2008), Ancient Bodies, Ancient Lives. Sex, Gender, and Archaeology, Thames & Hudson Ltd., pp. 24 and 51; 초기 사회의 젠더에 관한 논의는 다음을, 특히 1장을 보라. Greenberg, David F. 1988, The Construction of Homosexualit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본문으로]
  41. Jarvenpa, Robert and Hetty Jo Brumbach, “Hunter-Gatherer Gender and Identity”, in Cummings et al eds (2014), pp. 1244-1248. [본문으로]
  42. Hodder, Ian (2006), pp. 210-211 and 218. [본문으로]
  43. Rohrlich, R. (1980), “The State Formation in Sumer and the Subjugation of Women”, Feminist Studies, Spring. [본문으로]
  44. Brosius, Bernhard (2004), “From Çayönü to Çatalhöyük. Emergence and development of an egalitarian society”, 다음에서 재인용함. Choonara, Joseph and Chris Harman (2009), “Pick of the Quarter”, International Socialism, 123, Summer, p. 223. [본문으로]
  45. Scott, James C. (2017), Against the Grain. A Deep History of the Earliest States, Yale University Press, pp. 232-234. [본문으로]
  46. Engels (1972), p. 120. (국역본: 94쪽) [본문으로]
  47. Engels (1972), pp. 71-2. (국역본: 9쪽) 강조는 인용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