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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Marksist Tutum, 터키의 자본주의 발전과 노동계급운동 약사

원제: A Brief History of Capitalist Development and Working Class Movement in Turkey


참고용으로 오래 전에 번역했던 글.

  

http://en.marksist.net/marksist_tutum/a_brief_history_of_capitalist_development_and_working_class_movement_in_turkey.htm_0





터키의 자본주의적 발전과정은 서구에 비해 다소 뒤늦은 것이었다. 이 역사적 지연은 터키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데에 의존한 특수한 사회경제적 구조로부터 기인한다. 이러한 이유로 터키 자본주의의 독특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근대 터키의 역사적 배경을 형성하는 오스만 제국의 경제 사회사를 개괄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스만 국가는 14세기 초반(1300년) 건설되었고, 이스탄불 정복(1453년) 이후 진정한 제국이 되었다. 오스만 국가의 역사를 검토하면서 우리는 성립에서 해체까지 600년을 포괄하는, 각자 특징을 지닌 세 가지 다른 시기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17세기까지 이어지는 첫 시기는 거대한 제국으로의 성장기로, 오스만 국가가 아시아와 유럽을 정복하여 그 영토가 팽창하였던 시기였다. 사회-경제구조와 정치구조라는 측면에서, 이 시기에 오스만 국가는 아시아적 생산양식(Asiatic mode of production)이라는 기초 위에 형성된 전통적인 동양적 전제정(Oriental despotism)의 특성을 반영했다.


17세기에서 19세기로 이어지는 두 번째 시기는 서구 자본주의가 성장하기 이전이지만 오스만이 불안정해졌던 시기였다. 오스만 전제정의 경제적 기초를 구성하는 토지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국가 행정에서 부패와 무질서가 늘어나며, 국가지배계급 사이의 권력투쟁이 격렬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세기 전반을 아우르는 세 번째 시기는 해체의 시기로, 제국은 여러 부분으로 해체되기 시작하여 서서히 서구의 반(半)식민지가 되어갔던 시기이다.




오스만 사회와 아시아적 생산양식


마르크스는 전(前)자본주의적인 소유형태와 생산관계의 역사적 진화를 살펴보면서, “아시아적 생산양식”과 “동양적 전제정”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동양에서 볼 수 있는 이 사회경제구성체는 고대 노예제 혹은 중세 봉건제의 생산양식과 전혀 유사하지 않았다.


서구의 특정한 역사적 조건 아래에서 나타난 고대 노예제와 중세 봉건제의 공통적 특징은, 두 생산양식이 개인적-사적 소유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 토지에서 노동하는 [노예와 농노라는] 직접 생산자가 만들어낸 잉여를 착취했던 것은 사유지 귀족(noble private landowners)이었다. 노예제 사회와 봉건제 사회의 국가는, 직접 생산자에 대한 대토지 소유자의 지배를 보장하기 위해 특별히 조직된 억압수단이었다.


하지만 이 동양사회의 역사적 진화를 소유형태와 생산관계의 측면에서 관찰할 때, 계급과 국가의 구성은 상당히 다르게 발전했다. 왜냐하면 이들 사회에는 토지에 대한 개인적-사적 소유가, 즉 서구에 존재했던 사유재산을 지닌 계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양 사회에서 모든 토지와 자연 자원의 소유는 전제군주가 수장으로 앉아있는 국가라는 “고등한 통일체(higher unity)”에 속해 있었다. 국가는 모든 토지의 실제 소유주이자, 직접 생산자(농경공동체)에 의해 생산된 잉여의 실제 소유주였다. 전제국가는 모든 농경공동체의 무게중심이었고, 이 공동체 이전부터 존재해오던 질서를 수호하는 “성부”로 등장했다. 동양사회의 지배 권력으로 존재하는 전제 국가는 세 가지 기본적인 기능을 갖고 있었다. 전쟁과 정복(대외 약탈), 토지에 대한 세금(국내 약탈), 재생산에 필요한 공적 업무가 그것이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과 『자본론』에서 “아시아적 생산양식”과 “동양적 전제정”을 검토했고, 이러한 주제에 대한 많은 저술들에서 오스만 사회의 역사를 인도, 중국, 이란, 러시아와 유사한 동양적 전제정의 역사로 평가했다.


실제로도 적어도 19세기까지의 오스만 사회는 생산양식과 국가구조라는 측면에서 동양적 전제정의 전형적인 사례로 간주된다. 오스만 국가는 건설되고 나아가 팽창했던 시기에 많은 토지를 정복했으며 이 토지는 곧 국가의 소유가 되었다. [직접 생산자인] 무슬림과 비(非)무슬림 주민들은 토지에 속박된 납세자[레아야(reaya)]가 되었다. 군사관료[시파히(sipahi)]는 이 토지의 행정을 수행하기 위해 임용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군사관료는 국가 지배계급의 가장 중요한 분파였다. 시파히는 자신이 운영하는 토지에서 중앙당국(술탄-국가)을 대변했고, 토지의 관리, 레아야가 생산한 잉여의 수취(이것은 세금이라는 형태로 이뤄졌다), 그리고 전시 상황에서 오스만 병사들에 대한 감독을 책임졌다. 토지 위에 설립된 이러한 생산관계는 오스만 국가에 있어 상당히 중요했다. 오스만의 경제가 전쟁과 토지정복에 기반하고 있었고, 이러한 생산관계는 오스만이 거대한 군대를 길러낼 수 있게 하였기 때문이다.


오스만 사회에서 문관이든 무관이든 어떤 개인 지배자도 자신의 권한을 통해 토지재산의 소유자가 될 수 없었다. 그 결과 그들은 생산자 농민을 개인적으로 착취할 권리를 누릴 수 없었다. 당시의 지배적인 상황은 개인이 개인적 부를 축적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부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오스만의 질서 속에 “봉건영주-농노” 관계 혹은 “귀족-노예” 관계와 유사한 관계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스만 국가의 중앙 전제적 구조와 토지 재산의 압도적인 국가소유는 독립적인 힘이, 즉 영주화(seigniorisation)가 발전하여 중앙 정부에 대항하도록 전혀 허용하지 않았다. 토지재산과 주권의 유일한 소유자는 군주(술탄)로 의인화된 국가였다.


그러므로 오스만 제국에서의 착취체제는 개인적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작동했고, 국가를 통해 수행되었다. 세금의 형태로 직접 생산자로부터 빼앗은 잉여는 먼저 국고로 수집되었고, 이후 봉급과 보조금이라는 형태로 국가 지배계급(왕궁의 고관, 상위 문무관료, 종교학자 울레마[ulema])에게 분배되었다. 고도로 집중되고 위계적-관료적인 방식으로 조직된 지배계급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전제군주(술탄)가 앉아있다. 그는 이른바 “신의 이름으로 토지를 지배하고 그렇기에 성스러운 위치로 승격되었다”고 간주된다. 술탄은 집적되고 집중된 국가권력을 상징한다.


오스만 사회의 계급 구조 오스만 사회의 사회구성은 맨 위의 국가 지배계급과, 맨 아래의 직접 생산자(농민과 장인)으로 이뤄져있다. 농경공동체와 도시의 장인길드 모두 중앙국가의 엄격한 통제 아래에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사회조직에서 서구적 형태의 성숙한 상인계급은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할 수도 없었다. 거의 대부분의 잉여는 국가의 손에 집중되었고, 국가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용되었다. 그러므로 사적인 무역이나 자유로운 교환을 위한 상품은 남아있지 않았다. 이러한 조건 아래서는 오스만의 체제 내에서 상인자본의 축적과 상인계급의 형성이 불가능했다. 오스만 사회에서 무역이란 도시에 거주하는 (전제군주의) 왕궁, 군대, 고위 문무관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장거리 무역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무역을 수행했던 것은 국가가 임명한 관료들이나 (오스만 체제의 일부가 아니었던) 해외로부터 온 상인들이었다. 그러므로 국가가 했던 것은 상품거래가 아니라 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사용가치의 교환이었다.


오스만 경제의 본질적 기초이자 농경공동체 안에서 노동하는 피라미드 맨 밑바닥의 생산자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은 도시의 경제적·사회적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 고립된 삶을 살고 있었다. 이러한 아시아적 농경공동체에서 사적 소유, 상품, 교환관계는 전혀 발전되지 않았다. 상당히 낮은 수준의 분업, 농업과 수공업의 전적인 통일, 공동체 내에서 모든 필요의 충족 등 이 모든 것들은 농경공동체가 자립적이고 고립적인 경제단위라는 지위를 유지하도록 했다. 이러한 특징들 때문에 농경공동체는 오스만 전제정 아래 수백 년 동안 스스로 재생산되었고 별 일 없이 존속했다.


마르크스는 겉보기에 순진하고 무해한 아시아적 농경공동체가, 그것이 존재했던 어디에서나 동양적 전제정의 경제적 기초를 형성한다고 이야기했다. 시장과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은 사적 소유와 자유로운 교환이 없는 곳에서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치세 아래에 있던 동양 사회에는 자본주의가 발전할 내부 동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회에서 자본주의는 외국의 행위자에 의해서만 등장할 수 있었다.


오스만 사회의 진화는 서구의 발전과 완전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서구에서 국가는 사회 자체의 진화를 따라, 즉 경제적 관계 안에서 사회계급의 우위에 따라 형성되었다. 반면 오스만 사회에서 사회관계와 계급은 국가에 의해 주조되었다. 오스만 사회의 비생산적인(기생적인) 요소(왕궁의 고관, 고위 문무관료, 종교의 울레마)의 비중은 중세 유럽의 봉건사회보다 컸다. 그러므로 그들은 오스만 사회의 도시 형성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 도시는 중앙권력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형성되었던 서구의 “자치도시”가 아니었다. 그와 반대로 그 도시는 국가 자체에 의해 건설되었고, 국가계급이 거주하던 행정본부였다. 지배계급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필요성이 이 도시의 산업조직과 무역조직을 낳았다. 그러나 산업과 무역은 독립적인 개인의 사적활동이 아니라 국가기능을 통해 발전하였다. 그러므로 오스만의 도시에서 산업 활동과 무역 활동은 완전한 국가통제 아래에 있었다. 이러한 비타협적인 국가주의는 오랜 기간 동안 서구와 유사한 시장체제의 형성과 교환의 발달을 가로막았다. 그러므로 16~17세기 서구에서 발달하고 있었던 자본의 본원적 축적 과정과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은 오스만 사회에서 경험할 수 없었다.


이러한 종류의 사회구조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허용할 내부 동력이 부재했다. 엥겔스가 1890년 『신 시대(Neue Zeit)』에 썼던 글에서 밝혔듯이, “모든 동양의 지배처럼 터키의 지배 역시 자본주의 사회와 양립할 수 없다. 폭군적인 통치자와 탐욕적인 파샤들의 옥죔으로부터 잉여를 보호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부르주아적 소유의 첫 번째 본질적인 조건, 즉 상인과 그의 재산의 보호를 관찰할 수 없다.”




오스만 전제정의 동요기


아메리카의 발견과 새로운 교역로의 개척 이후, 서구 유럽에서 무역의 급속한 발전과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 진행되었다. 특히 16, 17세기 봉건적 생산관계가 해체된 영국에서, 새로운 계급(부르주아)이 성장했고 미래의 산업 자본주의의 선행조건(매뉴팩처)이 등장했다. 이 중상주의의 시기는 전 세계의 식민주의 정책을 동반했다. 이런 열광적인 자본주의 발전과정은 18, 19세기에 순조로운 성장을 유지해 나갔다.


하지만 동시기 오스만 제국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오스만 국가는 정적인 구조 때문에, 발전하는 서구 앞에서 그 힘을 잃었고, 17세기가 시작하면서 정체기에 들어갔다. 이 시기에 오스만의 아시아적 토지제도는 해체되어가고 있었다. 새로운 영토 정복의 부재, 동방 무역로의 중요성 감소, 늘어나는 밀수, 불충분한 농업생산 등은 오스만 국가의 재정수입 감소로 이어졌다. 17세기 초 오스만 국가의 지출은 수입의 3배 수준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재정 부족에 사로잡힌 오스만 재무부는 새로운 수입원에 당장 의지해야했다. 그러나 토지 수입 이외에 수입을 짜낼 수 있는 원천이 없었다. 수입 증대를 위해 국가는 할 수 없이 경쟁적인 응찰을 통해 매매세를 수취할 권리를 제공했다. 이런 식으로 국가는 토지 관리권을 군사관료(시파히)의 손에서 빼앗아 뮬테짐(multezim. 이런저런 방식으로 개인적 부를 축적했던 유력가)이라 불리는 사적 개인들에게 주기 시작했다. 이것은 오스만의 토지제도의 완전한 퇴보와 해체로 이끈 매우 중요한 발전이었다. 농업생산과 잉여를 통제하는 권력이 바뀌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세금이라는 형태로 농업 잉여를 직접 수탈했던 국가를 이제 사적 개인이 대신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국가의 수입을 공유하는 새로운 요소들이 등장했다. 이 상황은 국가계급(술탄과 문무관료)과 나란히 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시간이 지나자 근본적으로 국가에 귀속되었던 토지소유가 법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사실상 뮬테짐의 손으로 옮겨갔다. 그러므로 국가소유에 기초한 구식의 아시아적 토지제도와 함께, 이제 사실상 사적 개인의 소유(즉, 토지강탈)와 사적 착취관계에 기초한 새로운 토지제도(일종의 지방 전제정과 지주제도)가 등장했다. 이 유력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들의 사병을 만들었고 중앙권력에 저항했다. 18세기부터 중앙권력(술탄)은 점점 더 지방 전제정과 지주에 필사적으로 맞섰지만 이러한 원심력을 극복할 수 없었다.


국가소유의 토지를 차지하는 데에 열심히 참여했던 또 다른 분파는 대신(vizier), 파샤, 지방총독과 같은 고위관료와, 국가계급의 일부분이었던 종교학자 울레마(ulema)였다. 오스만 법에 따르면, 이들 관료들이 개인적으로 사유지 재산을 갖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관료들은 이 장애물에 대한 해결책을 찾았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종교적 자선”과 “사회적 연대”를 위해 설립된 “와크프”(waqf, 일종의 재단)에 토지를 할당하는 것이 가능했고, 토지 경작권은 이 와크프에 양도될 수 있었다. 총독과 파샤는 이러한 와크프의 설립을 통해 국가소유의 토지를 자신의 손에 쥘 수 있었다. 이로써 지방 전제군주와 지방영주와 함께 최고위 국가 관료에 의한 국가 소유의 토지의 약탈이 시작되었다. 터키 경제사에서 와크프 제도는 공공재산을 약탈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기이하게도 와크프 제도는 공화국 시기에도 계속 존재해 왔고, 심지어 여전히 부르주아 국가의 보호 아래 존재하고 있다. 오스만 전통의 유산인 이러한 국가 와크프는 수백 달러와 수백 가지의 사업이라는 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여지껏 지배 관료에 의해 약탈가능한 상태에 놓여있다.


물론 오스만 토지제도의 부패로 가장 고통을 받은 이들은 토지에서 일하는 생산자들(레아야)였다. 이전에 레아야는 오로지 국가에게 세금을 납부할 의무만 있었지만, 이제 지방 전제군주의 무자비한 억압과 착취에 종속되었다. 이윽고 레아야는 지방 전제군주, 영주, 고리대금업자 뮬테짐(특별세 징수자)의 무자비한 억압과 착취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변형의 결과로, 17, 18세기 농민들은 토지를 떠나 실업자가 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체제에는 토지에서 쫓겨난 이 대중들을 고용할 수 있을 만한 산업발전이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노상강도가 되거나, 도시로 가서 고용되지 않은 걸인 무리를 형성했다. 제국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 진 외진 지역에서는 완전한 무정부상태, 무질서, 혼돈이 팽배했다.




해체의 과정


오스만 제국의 전통구조의 보다 근본적인 해체는 19세기에 서구 자본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났다. 이 과정은 오스만 제국이 반식민지가 되어 붕괴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부의 행위자였던 서구 자본주의가 오스만 제국의 최종적 해체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할 수 있다.


19세기에 오스만의 시장은 서구 자본주의에 개방되었다. 그와 동시에 오스만 제국은 외채를 통해 서구 은행가들에 더욱 더 의존하게 되었다. 반면, 같은 시기 철도와 연락망이 외국자본에 의해 설치되었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시장의 발달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기초였다. 해운과 조선, 그리고 군사적 목적을 위한 광산과 공장의 개방 등은 이 시기의 또 다른 발전이다. 이러한 과정과 함께 사유지재산을 발전시키기 위한 수단들이 취해졌다. 이것은 주로 항구 주변의 비(非)무슬림으로 구성된 매판 부르주아의 성장과 함께 이뤄졌다.


자본주의가 제국주의의 단계에 도달한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의 오랜 해체과정은 마지막 시기에 진입했다. 이 시기에 오스만 제국은 이란과 중국처럼 진정한 의미의 반식민지가 되었다. 예를 들자면, 프랑스 자본주의에 의해 설립된 오스만 은행이 점차 중앙은행으로 기능하기 시작하여 오스만 통화의 관리를 담당했다. 또한 극심한 부채위기 이후 오스만 재무부가 서구 국가들의 대표들로 구성된 채무관리국(Düyun-u Umumiye)이라 불리는 국제 협의회로 넘어갔다.


그러나 오스만의 지배계급은 전체적인 쇠락과 마찬가지인 이 과정을 소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일한 태도로 행동한 것도 아니었다. 유럽을 뒤쫓아 가기 위해 그들은 차르의 러시아에서 있었던 것과 유사한 개혁을 받아들여 국가기구(주로 군사력)를 강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발전으로 인해, 오스만 지배계급 전체 내에서 대립되는 이해관계와 관점을 갖는 대략 두 개의 진영이 형성되었다. 두 분파는 오스만 국가를 자기 방식으로 구원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부류는 이러한 목표가 이전의 전제적 전통을 유지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다른 부류는 “서구화”와 “근대화”의 방법을 지지했다. 청년 튀르크 운동으로 구체화된 이 개혁주의 진영은 통일진보위원회(Committee for Union and Progress)라는 이름을 지닌 자신들의 독립적인 정치조직을 설립했다. 오랜 투쟁과 충돌의 과정이 지난 후, 이 진영은 1908년 가까스로 권력을 획득했고 입헌군주제를 선언했다. 이후 부르주아 공화국 건설을 이끌게 될 거의 모든 간부들이 이 운동과 조직에서 등장했다.


통일진보위원회의 민족주의적인 지도부는 이렇게 생각했다. 구원을 위한 해결책은 떠오르던 독일 제국주의와 가까이 지내는 것이며,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편에 서는 것이었다. 떠오르던 독일 제국주의는 제국주의 경쟁국들을 물리치고 오스만 제국에 상당한 영향력을 형성했으며, 세기의 전환기에 이르러 오스만 제국을 금융노예로 전락시켰다. 오스만 국가는 취약한 경제와 허약한 군대를 갖고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리고 패배하여 몰락했다. 전쟁 이후 제국주의 세력은 중앙 아나톨리아의 작은 지역만을 제외하고 오스만 제국의 모든 토지를 차지했다. 이것은 오스만 지배계급 안에서 모순이 첨예화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모순의 첨예화는 이후 부르주아 공화국의 건설을 성취한 세력들 사이에 결정적인 분리를 낳았다.


독립과 부르주아 공화국 건설을 위한 전쟁: 1919-1923 1923년에 부르주아 공화국이 건설되었다. 공화국 건설은 터키의 자본주의 발전 개시와 연관된 역사적 전환점을 대표했다. 우리가 위에서 지적했던 이유들로 인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될 때까지 오스만 사회에는 서구적 형태의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았다. 그 결과 서구처럼 민족 부르주아가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스만 군의 장교들이 과거 “국가계급”이 지닌 전통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하게 일관된 세력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아나톨리아를 점령하고 있는 유럽 제국주의자들에게 맞선 민족 독립투쟁의 지도부를 떠맡았다. 오스만의 파샤들 중 최고위에 있던 이는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이었다. 그는 해방된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서구적 형태의 자본주의적 민족국가가 형성되는 것을 준비했던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민족 부르주아의 역사적 임무는 이 오스만 파샤에 의해 수행된 것이었다!


터키에서 부르주아 공화국 건설과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제국주의 시대에 수행되었다. 이 시기는 또한 위대한 10월 혁명이 제국주의-자본주의의 고리를 깨부순 역사적인 시기였다. “노동자 농민” 소비에트 권력의 형성은 그 즉시 피억압 민중의 해방을 위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러므로 소련의 이웃국가 터키의 민족독립투쟁은 두 개의 상이한 경향의 영향 아래서 발전되었다. 한편에는 10월 혁명과 볼셰비키가, 다른 한편에는 부르주아 민족주의가 있었다.


이 상황은 제국주의 점령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두 개의 분리된 운동을 야기했다. 첫 번째는 케말이 이끈 민족주의 운동으로, 오스만 장교와 아나톨리아인 상인 부르주아, 아나톨리아 출신의 대지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두 번째는 녹색군(Green Army)이라 불린 이들로, 러시아 혁명과 농민 소비에트의 영향 아래 있었다. 이들은 주로 농민을 기반으로 하여, 사실상 게릴라 전쟁을 벌였다. 또한 이 운동은 아직 미성숙한 공산주의 운동과 어느 정도 접촉하고 있었다.

오스만 파샤와 관료들이 이끄는 민족주의 운동은, 세계대전의 종결 이후 형성된 새로운 세계 균형과 소련의 존재를 성공적으로 이용하여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했다. 제국주의 세력은 아나톨리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세계 대전의 결과로 상당히 약화되었다. 유럽에서 거대한 혁명적인 저항과 반란이 노동계급 사이에 일어났고, 또한 식민지의 독립운동이 강력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혁명적 인터내셔널이 소련의 새로운 혁명정부 지도 아래 설립되었고, 이 두 개의 역동성을 포용하고 지도하려 시도했다. 객관적 토대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및 소련이 초래한 공포·위협 모두 제국주의 세력의 야망을 약화시키는 불리한 요소였다. 아나톨리아의 민족주의 지도부는 이러한 제국주의의 약점을 능숙하게 뛰어넘었고, 동시에 소련을 향해 아첨하며 그들로부터 중요한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얻는 데에 극도의 열정을 보여주었다.


영국점령 아래에 있는 이스탄불 정부에 독립적으로 행동했던 민족주의 지도부는, 1920년에 재빨리 앙카라에 새로운 국민의회와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일종의 이중 권력상황을 형성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케말이 이끈 민족주의 운동은 영국 제국주의와 외교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했다. 이 접촉에서 영국은 미성숙한 공산주의 운동과 농민들로 구성된 녹색군 게릴라 부대를 제거하기 위해, 그들에게 소련과 거리를 둘 것을 요청했다. 영국이 바라던 대로 1921년을 기점으로 이 요소들은 모두 해체되었고, 앙카라 정부는 1921년 2월 런던에서 열린 회의에 초대받는 목표를 달성했다.


알려진 것과 달리, 케말이 이끈 정규군은 제국주의 세력과 직접 교전하지 않았다. 런던 회의 이후, 서구 점령군은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하기 시작했다. 소위 독립전쟁은 사실 동쪽의 아르메니아인들, 그리고 대부분 서쪽의 그리스 점령군에 맞선 전쟁이었다. 이스탄불과 그 주변을 점령한 영국과, 에게 해와 지중해 지역을 점령한 이탈리아, 아나톨리아의 남부와 남동부를 점령한 프랑스와는 전쟁하지 않았다. 비록 프랑스 군에 맞선 소규모 무장투쟁이 있었지만, 이 프랑스 부대가 실제로는 아르메니아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한다.


아나톨리아 서부의 그리스인(덧붙이자면 영국은 런던회의 이후 곧바로 그리스에 대한 지원을 포기했다)을 물리친 것에 뒤이어, 무스타파 케말이 이끈 앙카라 정부는 1923년 로잔회의에서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7월에 비준된 로잔협약으로부터 세 달 후, 공화국 선언(1923년 10월 29일)과 함께 아나톨리아 땅 위에 몰락한 오스만 제국을 대신하여 부르주아 공화국 탄생이 달성되었다.


터키 부르주아는 공화국 수립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매우 미약했고 비겁했다. 한편으로는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 민족 독립을 위해 투쟁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요구들을 수행하길 두려워했다. 아나톨리아에서 소련 혁명과 유사한 민중운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터키 부르주아가 오스만의 낡은 전제정이란 아시아적 국가 전통을 완전히 폐지하지 못했던 이유였다. 그와 반대로 그들은 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와서 버무려 버렸고, 그 뒤 공화국이란 향신료를 약간 첨가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무스타파 케말이 성취한 새로운 부르주아 공화국의 민주적 내용은 매우 미약했다. 반면 공화국의 억압적이고 전체주의적인 특징은 매우 명백했다.


그러므로 터키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정치적 개혁은 비스마르크 식의 방법을 통해 위로부터 수행되었다! 그것은 급진적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결과가 아니었다. 새로운 부르주아 공화국은 지주들과 타협했고, 그들과 권력을 나누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1960년대까지 프로이센의 자본주의 발전경로를 따라갔다. 그렇게 터키에서 자본주의 발전은 극도로 지체되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새로운 정치세력의 계급적 기반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오스만 시기의) 전통적인 지배계급 지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문무관료와, 상인 부르주아, 그리고 아나톨리아의 대토지 소유자였다. 지배계급 블록에서 지배적인 요소는 케말이 이끈 문무관료였다. 케말주의 세력은 이미 1923년 경제회의에서 자본주의의 길을 따라갈 것이라 선언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정부는 자유주의적 관계에 기초한 자본주의 경제를 지지하고, 외국 자본가에게 어떤 문제도 없다고 선포했다. 이에 맞춰 앙카라 정부는 오스만 제국의 채무에 대한 책임을 떠맡고, 앞으로 6년 동안 오스만 시대에 획득한 제국주의 국가의 관세특권과 면세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확약을 했다.




터키공산당의 창설


터키공산당(The Communist Party of Turkey, TKP)은 10월 혁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1920년 코민테른의 한 지부로 창당되었다. 당의 창당회의는 볼셰비키의 후원 아래 바쿠(Baku)에서 개최되었다. 하지만 1년 후 영국 제국주의와 협약을 맺은 무스타파 케말의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이 성장 중이던 터키공산당을 대상으로 여러 음모들을 벌였다. 그들은 터키 공산당의 성장과, 소비에트 유형의 정부로 이어질 노동자-농민 혁명의 가능성이라는 전망에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음모로 인해, 당의 첫 총서기 무스타파 수피(Mustafa Suphi)를 포함하여 공산당의 지도적 인물 15명이 1921년 1월 28일 흑해의 검은 물 속에 수장되어 살해당했다.


역사의 이 한 페이지는 터키 공산주의자들에게 엄청난 비극이다.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은 터키 공산주의 운동을 분쇄하고자 제국주의와 비밀 협약을 맺고 음모와 술수에 호소하는 한편, 그와 동시에 그들은 반제국주의적 민중주의 운동인 것처럼 굴며 소련으로부터 도움을 추구하는 기만적인 정책을 추구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 전술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은 사실상 민족해방 운동에서 부르주아들을 신뢰하여 그들을 동맹세력으로 간주하는 오류의 충격적인 예시이다. 소련은 비슷한 예로 중국의 장제스 사례를 경험한 바 있다.


사실, 터키의 사회주의 운동은 오랫동안 비스마르크류의 부르주아 지도자인 무스타파 케말의 임무와 케말주의의 진정한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다. 거의 대부분의 터키 좌파들이 지닌 근본적인 약점은 반자본주의적인 내용 없는 반제국주의에 대한 이해였다. 이것은 왜 터키 좌파가 케말의 운동을 수년 간 진정한 반제국주의로 간주했고, 심지어 오늘날도 좌파들 사이에 케말주의에 대한 지지가 남아있는가를 설명해주는 이유다. 좌파가 범한 또 다른 오해는 케말주의의 국가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거의 동일시한 것이다. 그래서 좌파 운동 전반은 이 국가주의를 감시하는 것을, 터키 자본주의를 키우고 현지 부르주아에게 자본축적을 제공하는 것을 자신들의 의무로 여겼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케말주의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접근 때문에 터키 좌파는 많은 영역에서, 특히 쿠르드 문제에서 앞을 내다보지 못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이러한 문제에 대해 쇼비니즘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터키 부르주아 공화국의 역사는 노동계급과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끊임없는 박해, 금지, 국가테러의 역사이다. 그 예로 가장 오래된 터키의 좌파정당인 터키공산당은 70년의 역사 동안 단지 2년 동안만 합법적인 틀에서 움직일 수 있었다. 그 나머지 기간은 비합법과 기밀유지라는 조건 아래 있었다. 터키공산당은 거의 모든 존속 기간 동안 스탈린주의적인 소련의 공식노선을 따랐다. 과거에 공산당 안에 반대 조직이 등장했음에도, 그들 어느 누구도 스탈린주의와 결별하지 못했다. 터 키공산당의 역사에서 한 가지 예외는 1932년 조직되었고 터키의 위대한 시인 나짐 히크메트 (Nazım Hikmet)가 지원했던 "노동자 반대파(Workers’ Opposition)"였다. 그러나 이 반대파 조직은 트로츠키주의라는 비난을 받았고, 스탈린주의적인 당 지도부에 의해 해체되었다.




케말주의 세력의 첫 시기: 1923-1930


부르주아 국가의 첫 해에 추구되었던 경제정책은 서구 자본주의와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틀 안 에서의 자유주의 경제정책이었다. 이러한 정책의 주된 목적은 자본주의 발전을 따라가면서 민족경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터키에는 자본주의적인 투자에 착수할만한, 민족 부르주아 계급도 충분한 자본축적도 없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 동안 경제정책의 중점은 사적 자본가의 기업가 활동을 장려하고 지원하는 것이었다. 오스만 관료들의 지도 아래 성립된 신생 부르주아 국가는 자본이 터키를 떠나 비무슬림 매판 부르주아에 의해 유럽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고자 했다. 이 자본을 서구로 계속 흘러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터키 내부에 투자되도록 이용해야만 하는 존재가 바로 터키의 토착 부르주아였다.


정치권력은 이 시기 내내 주로 문무관료 집단의 손에 남아 있었다. 이 집단들은 어떤 의미에서 초기의 민족 부르주아를 후원하고 있었다. 이것이 터키 자본주의 발전과정의 특수한 측면이다. 그들의 목표는 부르주아 계급과 서구 형태의 부르주아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일한 국가집단들이 이러한 목적에서 공화인민당(Republican People’s Party, CHP)을 건설했다.


그러나 자유주의 정책과 각종 진흥법 입법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산업의 진보도 바랐던 수준의 “민족” 부르주아 계급도 만들어낼 수 없었다. 이것을 위한 충분한 토착 자본의 축적도 서구로부터 외국자본의 유입도 없었다. 케말의 정책 일반은 (자본주의 국가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서구화를 목표로 했지만,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은 여전히 신생 터키 공화국에 신중히 접근했다. 그 결과 이 첫 시기 내내 터키는 주로 전(前)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지닌 “농경국가” 로 남아있었다.


이러한 초기에 여러 해 동안, 자본주의 발전의 틀을 형성했던 상부구조의 개혁이 몇 가지 수행되었다. 이러한 개혁운동을 모색하면서 무스타파 케말은 다음과 같이 신생 부르주아 공화국의 목표를 드러냈다. 그것은 바로 “현대적 수준의 서구 문명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영역에서 무스타파 케말이 시도했던 이 “서구화” 개혁은 오스만 사회와 연속선상에 있던 사회에서 성취되기란 정말 어려웠다. 게다가 이러한 개혁이 실행 가능하려면, (산업화, 토지 개혁 등의) 토대의 적절한 변혁이 반드시 이뤄져야 했다. 그러나 이 변혁이야말로 터키가 결여했던 것이었다! 지주 제도는 여전히, 특히 동부와 남동부(터키 쿠르디스탄) 지역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케말주의 관료들은 이 지주 제도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동맹을 맺어왔다. 그러므로 사회영역에서의 상부구조의 개혁 중 대부분은, 현실적인 한계를 넘어설 수 없으며 “인민으로부터 소외”된 피상적인 개혁으로 남았다.




자본주의 세계공황과 터키의 “국가자본주의” 시기: 1930-1946


1930년 신생 터키 공화국의 경제난은 전혀 예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대공황이 발발한 시기[1929-1933]였다. 이 공황은 해외무역을 통해 터키 경제에 영향을 미쳤다. 터키의 수출이 주로 농업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농업 생산물 가격의 하락은 국가 및 지주의 수입이 줄어드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에 터키의 통화는 가치를 상당히 잃어버렸다. 게다가 이 불행한 시점에 오스만 제국의 빚을 지불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터키 재무부는 곤란에 처해있었다! 이 빚은 예산의 거의 1/10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이 우호적이지 않은 조건은 신생 부르주아 국가에게 새로운 경제 전략을 개발하도록 강제했다. 그리고 이 전략은 산업화를 시작하고 민족 경제를 건설하기 위한, 경제생활에 대한 국가의 직접적 개입(국가주의)을 포함했다. 국가의 지배적인 지위에 있던 문무관료 간부들의 분위기도 역시 이 전략을 시행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그들이 이미 지배계급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이제 자신을 국가의 주인이자 사회의 보호자로 간주했다. 케말주의 관료는 국가를 통해서만 오로지 터키의 “민족” 자본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세계 정세는 그들의 생각을 강화시켰다. 국가주의에 기초해 있다고 여겨졌던 이웃국가 소련의 경제는 눈에 띌 정도로 공황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반대로 성장을 유지했다. 터키의 지도자는 이 시기 소련의 성장을 주목하고 있었다.


이런 조건 아래서 터키 국가는 소련과 어느 정도 유사한, 제1차 5개년 경제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1930년부터 1946년까지 이어지며, 모든 경제 영역을 아우르는 완전한 “국가주의”의 시기였다. 정치적 삶은 공식적인 국가정당의, 즉 관료 지배를 대표하는 공화인민당의 일당독재 아래 있었다. 정당의 이름에 “인민(people)”이 들어가 있었지만, 그들은 민중과, 민중의 이해관계를 위해 일하지 않았다. 반대로 이 정당은 노동민중에 대항하는 “관료-부르주아-대지주” 블록의 대표자였다.


자본주의는 이 시기에 국가의 관리지도 아래 발전했다. 그러므로 서구와는 대조적으로 터키에서는 자본주의의 경쟁의 시기가 없었다. 이 시기에 국영기업은 급속히 퍼져 나갔고, 터키 경제에서 국영기업이 차지하는 산업 비중은 두 배로 늘었다. 1950년까지 은행, 대공업시설, 광산, 에너지, 화학, 운송, 통신, 섬유, 주류, 담배 등이 국가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러한 국가주의 및 “국가 자본주의” 실천은 민족 내부에서 노동의 초과착취를 통한 급속한 자본축적을 수단으로 토착 자본주의 산업과 “민족 부르주아” 계급의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만드는 것을 장기적인 기초목표로 삼았다.


이 시기의 국가주의는 극도로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정치적 틀 안에서 시행되었다. 그리고 노동대중에게 발언권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생활수준 역시 거의 진전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는 오직 “민중주의”와 “반제국주의”라는 일반적인 수사의 베일을 쓰고서만, 노동의 초과착취에 근거한 자본주의적 정책을 시행할 수 있었다. 케말주의 세력의 실천은 그 당시 스탈린주의 정당이었던 터키공산당의 몇몇 지도자들에 의해 지원받았다. 그들(그 중에는 당시 공산당의 총서기도 포함된다)은 공산당이 케말주의 세력의 꽁무니를 따라가길 원했다. 몇몇 지도자들은 공산당이 공화인민당의 국가주의를 지지하는 신문(Kadro, 터키어로 간부를 의미한다)을 출판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들은 케말주의 세력의 부르주아 민족주의 계급의 성격을 무시한 채, 이 국가 자본주의를 민중주의적이고 반제국주의적인 정책이라며 칭찬하였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옹호했다. “우리의 국가주의는 어느 계급에도 기반한 것이 아니며, 독립 전쟁을 벌이는 세계의 민중들에게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는 민족적 국가주의이다.” 국가주의를 사회주의와 무계급사회와 동일시하는 이 엄청난 환상은 그 시기부터 터키의 좌파운동 속에 살아 남아있고, 오늘날도 여전히 존재한다!


“영원한 지도자”로 선언되었던 무스타파 케말이 1938년에 죽은 이후, 일당독재 구조에 최소한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또 다른 오스만의 파샤였으며, “민족의 지도자”란 칭호를 받은 이스메트 이뇌뉘(Ismet Inonu)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터키는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노동대중은 전쟁을 치르는 것처럼 전례 없는 고통에 빠져있었다. 모든 나라에서 폭리를 취할 수 있었던 전쟁이 확산되면서, 군사지출의 급격한 상승, 매년 5-6%의 생산 감소, 상당수 생산인구의 군대로의 모병이 그들의 고통과 궁핍을 악화시켰다. 게다가 노동대중은 야만적인 억압과 테러의 체제 아래서 고통받았다. 그리고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등과 같이 터키에 살고 있는 소수집단 역시 이러한 억압을 공유했다. 나치 독일을 연상시키는 “부유세”라는 이름 아래 수행된 사업의 결과로, 그들의 재산과 자산은 몰수되었고 그 중 다수는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


지배계급의 몇몇 분파를 향해 취해진 경제적, 정치적 수단과 함께 이러한 조건은 사회 내의 불만과 모순을 악화시켰고, 전쟁의 여파 속에서 지배계급 블록의 정치적 분열로 나가는 길을 마련했다.


여기서 언급할 것은, 터키가 전쟁에서 어느 편을 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승리할 제국주의 진영에 스스로를 팔아넘길 준비를 삼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예로, 그들은 나치와 협력하고 있었던 인종주의적 파시스트 경향을 국가 안에서 성장하게 놓아두었다. 이것은 나치 독일의 승리할 경우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오로지 독일이 패배할 것이라는 게 명백해진 이후에서야 사라졌다.




전후 시기: 새로운 세계균형과 터키 (1946-1950)


2차 세계대전 내내 터키는 신뢰할 수 없는 태도를 취했고, 유럽의 연합국들의 편에 서서 나치즘과의 싸움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동맹국들에게 터키의 위치는 애매하게 보였다. 그러나 독일의 패배가 명백해지자, 약삭빠른 전과로 보상금을 얻기 위해 터키는 위선적으로 독일에 맞선 전쟁을 선포했다. 이 선포는 매우 늦게, 독일 붕괴 바로 전에 이뤄졌다.


새로운 세계구도 속에서 터키의 지배계급은 매우 변화한 세계 관계와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파시즘이 패배한 후에 유럽에서는 자유주의의 바람이 불고 있었고, 터키는 이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정치영역에 자유주의적 조치를 도입해야 했다. 심각한 경제문제와 마주한 터키 부르주아는 서구 자본주의의 경제원조를 간절히 원했고,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은 미국 제국주의에 다가가길 특히 원했다. 그러나 터키는 일당 독재가 새로운 세계정세 속에서 계속될 수 없음을 깨닫고, 1946년에 새로운 정당의 설립을 받아들여야 했다.


요컨대 세계 전반의 새로운 환경과, 미국 제국주의와의 새로운 관계는 다음 시기의 정치적 삶에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관료가 지배하던 공화인민당은 이제 지배계급의 몇몇 분파(특히 대지주와 상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지배계급이 공화인민당을 중심으로 형성했던 연합은 근본적인 분열을 겪었다. 대지주와 상인은 공화인민당을 떠나 민주당(Democratic Party, DP)을 형성했다. 민주당의 창당은 대지주와 상인이 자신들이 케말주의 관료들의 정치적 후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중요한 발돋움이었다. 그리고 1950년 민주당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거의 30년 동안 지속된 공화인민당의 일당독재는 끝났다. 이것은 공화국 역사의 한 시기가 종결되는 것을 의미했다.


일당 독재로 인한 야만적인 억압을 겪었기에, 광범위한 대중들은 1950년 선거에서 민주당에 투표했고, 그들을 압도적 다수의 의석을 차지하여 의회로 진출시켰다. 그러나 대지주와 자본가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민주당은 사실 진정으로 현존 질서를 수호하는 정당이었다. 이 체제가 어떤 다른 대안세력이 등장하도록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공화인민당을 없애기 위해 민주당에 매달렸다. 민주당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지하는 척하며 대중들의 분노를 돌리는 것에 익숙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 곧바로 장기독재 시기의 공화인민당만큼이나 노동계급과 좌파의 잔인한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1946년에는 민주당과 함께 몇몇 좌파정당들도 설립되었다. 예를 들자면, 터키공산당은 이름에 "공산주의"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정당을 만드는 것이 여전히 비합법이었기 때문에 두 개의 합법적 사회주의정당을 만들었다. 그 중 하나는 “터키사회주의노동자-농민당(Socialist Workers and Peasants Party of Turkey)”이었고, 다른 하나는 “터키사회당(Socialist Party of Turkey)”이었다. 그러나 비겁하고 약삭빠른 터키 부르주아는 좌파정당을 얼마나 용납하지 않는지 곧바로 증명했다. 케말주의의 공화인민당은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고 자유주의적 개혁이 계속 수행되어야 한다고 수행해야한다고 주장하던 와중에, 터키 부르주아는 이 두 사회주의 정당을 창당 6개월 만에 폐쇄시켰다.


다른 한편으로 터키 노동계급 역시 전후의 새로운 정치적 국면을 활용했고 합법적 노동조합을 설립했다. 공화국이 시작된 이래 노동조합이 허용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수백 개의 단 위조합이 설립되었고,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이 노동조합에 조직되었다. 노동조합 운동이 번창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그러나 터키 부르주아는 겁에 질렸다. 단 6개월 만에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에 의해 설립되었던 합법적 노동조합이 폐쇄되었고, 조합 간부들은 체포되었다. 이렇게 해서 터키 부르주아는 노동조합 운동의 등장을 간신히 진압했다.


노동계급의 경제적 사회적 권리라는 관점에서 볼 때 터키 공화국의 역사는 방해, 금지, 억압의 역사였다. 노사관계의 합법적 틀을 놓은 노동법은 1936년 공화국 선언 이래 13년 후에 통과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은 노동조합 결성, 집단교섭, 파업의 권리를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1947년에 노동자들은 단지 노동조합 결성의 권리를 쟁취했을 뿐이었다. 이 때조차 파업과 집단교섭의 권리는 비합법상태였다. 이 권리는 공화국을 선언한지 40년이 지난 1963년에서야 성취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부르주아 국가는 1960년이 되어서야 합법적 사회주의 정당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1936년 무솔리니의 파시스트적인 형법에서 취한 “공산주의 선전”을 금지하는 조항은 1990년까지 폐지되지 않았고, 이 특별법이 폐지된 이후에도 무솔리니의 형법에서 취해진 이 조항은 동일한 금지를 담고 있는 새로운 법에 포함되었다.




민주당 지배의 시기: 1950-1960


대지주와 수입·수출 상인들에게 유리한 경제 정책을 시행한 결과, 농업 부문의 자본주의적 발전이 이 시기에 열광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농업 생산량의 증가는 외채 원천의 확장을 야기했다. 이 필사적인 농업발전과 산업화의 상당한 진보 또한 세계경제정세의 발전에 의존했다. 1950년대 발전의 원동력은 새로운 농업용지의 개방과 발전된 농업기술의 사용, 즉 농업 부문의 자본주의적 발전이었다.


정치영역의 발전에 대해 말하자면, 이 시기는 정치권력이 상업 부르주아와 대토지 소유자의 연합으로 넘어가는 시기였고, 국가 행정부를 담당하던 전통적인 문무관료 집단-그들은 경제의 완전한 국가개입을 지지했다-의 해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경제 개입주의를 지지했던 전통적인 블록과 자유주의를 지지했던 부르주아 분파 사이의 갈등은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계속되었다.


터키와 미국 제국주의 사이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1952), 마셜 플랜에 터키를 포함하는 미국의 결정, 중앙조약기구(CENTO)의 형성 등, 이 모든 것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또한 터키는 한국전쟁에 적극적으로 군대를 보내 미국의 냉전정책을 지지했고, 중동에서 미국과 가장 가까운 동맹국 중 하나가 되었다.


계급관계에 대해 말하자면 이렇다. 터키 국가는 노동조합 운동을 통제하려 시도했다. 터키 국가는 자본주의 발전의 현존 단계에서 금지와 강압조치를 계속하는 것 외에 노동계급의 노동조합 운동을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미국의 지도 아래 1952년 터키노동조합연맹(Confederation of Turkish Labour Unions, Turk-İş)을 조직했다. 이 노동조합은 국가통제 아래서 운용되었다. 이 조직은 어느 정도 준공식적인 지위를 갖고 있었고, 터키 노동계급에 미국식 기업 노동조합주의를 심으려 했다. 여기에 미국에서 자유주의 자금이 들어왔고, 터키의 노동부가 노동조합의 탄생에서 산파 역할을 했다. 그것은 공공 부문의 노동자들을 터키노동조합연맹으로 충원하는 거대한 진전을 만들었다.


1950년에서 1955년 사이의 시기는 극단적인 자유주의의 시기였다. 하지만 이 시기는 곧 일어날 경제·금융위기의 전제조건들을 또한 준비했다. 부르주아 정부는 외채를 대규모로 늘려나갔고, 농업 수출로 인한 소득을 기대하여 주로 농업 부문에 대한 일면적인 투자정책을 추진했다. 이것은 제국주의 자본의 이해관계에 맞춘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자본가들은 직접적인 투자를 하는 대신, 높은 이율로 돈을 빌려주고 그들의 재화를 판매하여 이윤을 만드는 것을 선호했다. 그리고 이것은 곧 터키를 경제와 금융의 완전한 교착상태로 끌고 갈 것이었다.


터키 자본주의의 첫 번째 심각한 위기가 1958년에 터져 나왔다. 금융위기와 해외부채 위기는 민주당의 지배를 전복시킬 길을 준비했다. 해외무역적자는 전체 수출의 60%에 이르렀다. 산업을 위해 필요한 투입물(기계, 장비, 원료)의 수입이 불가능해졌다. 이리하여 투자가 줄고 경제가 수축하여 사회적 지출이 줄어들었다. 결국 터키는 해외 부채를 갚을 수 없는 처지로 전락했다. 물론 노동계급은 이러한 발전으로 가장 많은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군대의 하급 장교와 다른 정부부처 안의 하급관료들의 조건 역시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었다.


민주당은 국가기금과 은행을 통해 대지주들에게 자금을 퍼주는 일을 계속했지만, 경제공황이 발생했음에도 산업 자본가들에게 충분히 지원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는 산업 부르주아의 반동을 일으켰다. 또 어리석게도 민주당은 군사관료에 대한 보조금을 줄이고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켜 군대를 소외시켰다. 산업 부르주아는 진절머리가 났고, 대지주의 지배를 치워버릴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동시에 제국주의자들 역시 터키의 자본주의 발전의 장애물이었던 대지주 세력을 종식시키는 것을 지지했다. 제국주의는 이제 산업 부르주아가 주도하는 계획적 자본주의 발전의 수행을 지원했다. 하지만 그러한 경제의 본질적인 변혁은 민주당이 지배하는 동안 일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러한 발전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5월 27일 군사 쿠데타로 열린 새로운 시기: 1960-1970


민주당 지배의 막바지에 대규모 학생시위가 정부를 향해 분출되었다. 이것은 도시 중간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의 주요 모순을 등장하게 했다. 곧이어 중간, 하급 장교들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쿠데타 이후 오래지 않아, 멘데레스 전 총리와 두 명의 주요 장관이 즉각 약식재판을 받았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것으로 성취된 것이 무엇이든 간에 터키 산업 부르주아와 제국주의 모두 이 쿠데타를 반겼다. 이 하급 장교들의 의도가 어쨌든 쿠데타가 일어난 것은 궁극적으로 그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관료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은 아타튀르크가 도입한 공화국의 자유와 제도를 보호하기 위해 민주당의 비민주주의적인 실천에 맞서 혁명을 수행했다! 그렇지만 이 “혁명” 관료들은 쿠데타 이후 즉각 실시했던 첫 정치 선언에서 재빠르게 자신의 의도를 드러냈다. “우리는 모든 국제조약에 경의를 표한다. 우리는 북대서양조약기구와 중앙조약기구에 충실할 것이다.” 이 “혁명” 군사정부의 성명서는 재빨리 제국주의자들의 마음에 들어야 했고, 평소와 다름없으며 걱정할 필요 없다고 미국과 유럽을 안심시켜야 했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무스타파 케말이 만든 공화인민당은 장교들로부터 권력을 접수할 것을 요구받았다. 공화인민당은 상업은행(İş Bankası)의─공화인민당이 일정부분 소유하는 당시 터키의 가장 큰 은행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주변에 모인 도시 부르주아와, 부르주아 지식인, 그리고 문무관료를 대표했다. 이 집단은 계획적 자본주의 산업화(그들은 이것을 “혼합경제”라 불렀다)가 개시되고, 외국자본이 유치되길 바랐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서구 제국주의의 도움을 받아 5개년 계획을 준비하기 위해 “국가 계획부”를 설립했다. 이러한 계획을 통해 그들은 전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해체, 토지개혁, 농업에서 산업으로의 자원 이전을 수행할 작정이었다. 이러한 정책들은 근본적으로 대토지 소유주에 적대적인 조치였다.


이러한 짧은 야단법석 이후, 터키에서 의회체제의 규칙적인 일상이 선거과정과 함께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5년 정의당[Justice Party, AP]이 권력을 잡았다. 정의당은 민주당의 연장선에 있는 정당으로 설립되었지만, 이제는 과거와 달리 산업 부르주아도 대표했다. 정의당은 산업, 특히 조립산업에 우선권을 주는 정책을 따랐다. 이것은 불가피하게 자본의 집적과 집중의 성장을 이끌어냈다. 1960년은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볼 때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리고 대중운동으로 노동계급운동의 발전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1960년 5월 27일 쿠데타의 결과, 새로운 헌법이 시작되었다. 정치적 삶과 사회적 삶에서 상대적으로 민주화가 도래하면서 새로운 시기가 열렸다.


공화국의 첫 40년 동안, 토착 부르주아는 국가 자본주의가 제공한 자본 축적 덕분에 자라났다. 그리고 그들은 사적 공업 투자를 시작했다. 사적 자본주의 산업은 이 시기에 급속하게 발전했다. 그와 평행을 이뤄 노동계급 또한 급속하게 성장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60년대에 모든 사회가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번영하는 경향을 보여줬다. 사회의 모든 부문은 조직, 협회, 협동조합 등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40년 만에 처음으로, 금지되고 억압받은 좌파 서적이 공개적으로 출간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사상이 광범위한 지식인 부문의 주의를 이끌었다. 이러한 발전이 체계적이지 않은 과정으로 비약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유럽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의 역사에 비해 얼마나 뒤늦은 발전이었나!


1960년 이후 노동계급 운동과 관련된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1961년 합법적 사회주의 정당인 터키노동당(Workers Party of Turkey, TIP)이 설립되었고, 공화국 역사에서 최초의 대중정당이 되었다. 처음에 노동조합원에 의해 노동당이 설립되었다. 그러자 사회주의 지식인들이 당에 가입했다. 터키노동당은 즉시 노동조합의 활동적인 노동자들의 이목을 끌면서, 초기부터 도시와 농촌 지역에서 매우 대중적인 정당이었다. 1965년 터키노동당은 당시에 이용할 수 있던 보다 민주적인 제도를 이용하여 15명의 의원을 당선시키는 성과를 얻었다. 이러한 성공은 노동자들을 고무시켜, 1963년 파업과 단체교섭에 대한 규약을 얻어냈다. 이러한 성공에 고무되어 노동계급은 1963년 이후 투쟁을 계속했다. 당시 국가가 통제하는 터키노동조합연맹이 유일한 노동조합 연맹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성장하는 노동계급의 경제투쟁을 지지할 의지도 의사도 없다는 것이 빠르게 명백해졌다. 터키노동조합연맹이 노동자의 대의와 낯설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자, 이내 터키 노동조합 연맹의 내부에서 강력한 반대파가 발전했다. 새로운 세대의 노동자들과 지도자들은 “초정당적이고 비정치적인 조합주의”라는 가면 아래 부르주아 국가를 추종하는 식의 조합주의에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노동조합 투쟁의 새로운 통로를 여는 법을 찾았다. 네 곳의 노동조합(광산노동조합(Maden-Is), 석유화학노동조합(Lastik-Is), 출판노동조합(Basın-Is), 식품노동조합(Gıda-Is))이 터키노동조합연맹에서 탈퇴했고, 1967년 새로운 연맹인 혁명적노동조합연맹(Confederation of Revolutionary Workers’ Unions, DISK)을 창설했다. 이 노동조합들은 항상 투쟁의 최전선에 있었고, 특히 사적 부문에서 조직되었다.


혁명적노동조합연맹은 터키 전역의 노동조합 투쟁에서 구심점이 되었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 안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서클들의 초점이 되었다. 그리고 그 때 터키 노동계급의 역사에서 또 다른 중요한 전환점에 이르렀다. 그 때는 1968년이었다.


1968년 유럽에서 일어난 청년들의 행동과 총파업의 파동은 터키의 청년들에게 즉각 영향을 미쳤고 그들을 움직였다. 그 시기에 시작된 노동계급 투쟁의 파동 역시 부르주아의 합법적 틀을 넘어서려 했고, 강도와 진폭이 증가하여 공장점거, 보이콧, 비합법 파업과 같은 전술을 사용했다. 이러한 것들은 자발적으로 발전되었지만, 그것들 모두 혁명적 본질을 내재하고 있었다. 이것은 농촌지역 농민의 시위와 토지점거, 그리고 민족독립을 지지하는 청년들의 요구와 곧바로 함께했다. 혁명적노동조합연맹은 더욱 힘을 얻었고, 터키노동조합연맹에 소속된 노동자들이 그곳을 떠나 혁명적노동조합연맹의 회원이 되기 위해 투쟁하기 시작했다.


1968년에 유일한 합법적 대중 좌파정당은 터키노동당이었다. 상이한 정치적 성향을 지닌 많은 좌파 조직이나 개인들이 이 정당 안에서 정치적 작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반면, 비합법 정당이었던 터키공산당은 1973년까지 별도의 조직을 만들려 시도하지 않았고, 터키노동당 안에서 활동했다. 사실 터키노동당 지도부의 다수는 오래된 공산당원들이었다. 그렇지만 공산당의 구 간부들과 공산당의 역사에 무지했던 젊은 세대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공산당은 가장 오래되었고 어떤 점에선 터키 노동자 계급의 역사적 정당이었다. 그리고 직간접적으로 터키의 많은 정치조직에 영향을 미쳤다. 노동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60년대에, 그 당시 많은 다른 나라에서 그랬듯이, 특히 청년 운동 안에서 터키의 정치적 동원과정 속에서 게릴라주의와 마오주의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이것과 다른 요인들 때문에, 처음에 좌파의 다양한 분파들이 하나로 연합하였던 노동당은 점차 만성적인 분열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후로 터키에서 노동당의 초기 성장기에 견줄만한 노동계급의 대중적 좌파정당은 없었다. 불행하지만 불가피한 분열이 노동당 안에서 일어났다. 그 한편에는 게릴라주의와 마오주의가, 다른 한편에는 프롤레타리아트 조직 안의 활동을 고수했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가들이 있었다.


이 당시 국가는 성장하는 좌파 운동을 억압하고자 반동적인 종교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했고, 그들에게 노동자와 학생들에 저항하도록 지시했다. 중동의 아랍-미국 합작 석유회사─아람코 (ARAMCO)와 같은─들은 이 반동적 조직에 직접적으로 금전적 지원을 했다. 부르주아는 노동계급의 노동조합조직 뿐 아니라, 노동조합권리 일반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부르주아 정부는 혁명적노동조합연맹을 폐쇄하기 위한 법적 조치들을 내세우며 공격을 시작하자, 노동계급은 즉각 대중적인 반공세로 대응했다. 1970년 6월 15일과 16일에 15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이스탄불과 이즈미트(Izmit)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 날은 터키 노동계급 투쟁의 역사에서 매우 상징적인 날이다. 근대 터키 노동계급의 발상지인 이스탄불과 이즈미트의 거리는 이틀 동안 시위대의 힘과 씩씩함에 압도되었다. 이 날에 사장들은 집에 숨거나 즉각 이스탄불을 떠났다. 경찰과 군대가 노동자들을 총으로 공격하여, 3명이 죽고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상당했다.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대중들이 집을 나오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는 사실상 통행금지령을 시행한 것이다! 이 통행금지령은 모든 시위를 억압하려는 시도로 두 달 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수단도 이제 변화에 대한 열망으로 일어난 노동계급의 결의를 파괴할 수 없었다. 이렇게 강력한 좌파의 바람이 불어온 적은 이전까지 전혀 없었다.




1970년부터 1980년까지


터키 자본의 독점화 시기

이 시기는 산업의 독점화가 가속화되던 때이다. 은행과 산업자본의 융합, 서구와 같은 금융자본 집단의 형성, 정치에 대한 이들의 역할 상승이 이 시기에 일어났다. 그리고 자본가 계급의 분화가 더 발전되었다. 예를 들어, 은행과 산업자본에 기반을 둔 대자본가는 자신들의 독립적인 조직인 터키상공회의소(TUSIAD)를 만들었다. 그것은 이제 터키에서 “부자들의 모임”으로 불린다. 터키상공회의소는 1970년에 설립되었고, 그 이후로 줄곧 정치권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되었다.


이 시기 자본주의 발전의 독특한 특징은 외채와 “수입 대체”에 기반한 산업화 모델로 이행했다는 점에 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1970년대 조립산업의 급격한 발전으로 표현되었다. 예를 들자면, 터키에서 자동차 산업과 내구소비재 산업은 처음부터 조립산업으로 설치되었다. 부품들이 해외로부터 수입되어 이곳에서 조립되었다. 이 산업에 투자했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매우 적은 임금을 주어 착취율을 높이는 것을 통해 짧은 시기에 엄청난 자본축적을 이뤄냈다.


1971년 3월 12일 군사 쿠데타

공화국의 성립 이래 억압적인 정책을 통해 노동계급을 평정시켰던 것을 생각한다면, 터키의 부르주아는 오랜 시기동안 편안하게 지냈다. 하지만 부르주아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시기에 노동계급의 반대가 급속히 성장하는 것을 보고, 그 즉시 이 반대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고작 10년 뒤에 두 번째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노동자 운동이 급속히 발전하고 점점 전투적으로 변해갔고, 이와 더불어 청년들의 반미 행동이 성장하였다는 사실은 터키의 지배계급과 미국 제국주의를 두렵게 만들었다. 게다가 반미주의와 민족독립의 흐름은 군대 안에서도 발전하고 있었다. 지배세력은 또 다른 군사 쿠데타(1971년 3월 21일)를 일으키는 해결책을 찾았고, 의회를 폐쇄했다. 이 쿠데타는 초기에 좌익 쿠데타로 묘사되었고, 이로 인해 일부 소부르주아 혁명가들은 상당히 오해를 하였다. 사실 이것은 반동적 (우익) 쿠데타였고, 미국의 지도 아래 수행되었다!


이례적으로 억압적인 준군사정권이 존재하였던 1971년과 1974년 사이의 이 시기에, 노동자 운동과 발전하던 사회주의 운동은 극심한 타격을 받았다. 유일한 합법 정당인 터키노동당이 해산되었다. 혁명적노동조합연맹과 연계된 노동조합의 활동과, 청년단체는 금지되었다. 수천 명의 사회주의 지식인, 노동자, 청년 혁명가, 노동조합원 등이 체포되었고 고문당했다. 좌파 운동은 완전히 해체되었고, 조직은 흩어졌다. 터키 부르주아 국가는 갓 스무 살을 넘긴 대학생이었던 청년 운동의 세 지도자를 헌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교수형에 처했다. 부르주아의 목표는 청년 혁명가를 위협하고 사회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을 인민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터키 부르주아는 노동계급에 어떤 유예기간도 주지 않으려 이 예외적인 정치체제(억압적인 경찰국가의 실천)를 사실상 일상적인 체제로 바꿔놓았다.


두 번째 군사 독재 시기는 3년간 지속되었다. 그것은 1980년 9월 12일 등장할 군사 파시즘 정권을 위한 부르주아의 예행연습이었다. 군사독재는 그 자체로 특히 좌파의 발전을 막기 위한 새로운 금지법의 도입을 비롯한 많은 교훈을 이끌어냈다. 쿠데타는 예전 헌법의 민주적인 조항 모두를 폐지하여 상대적으로 자유주의적이었던 1961년 헌법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것은 반(反)사회주의적인 새로운 조항을 형법에 도입했다. 다른 한편, 그것은 노동계급을 속이기 위해 50년간 국가정당이었던 인민당을 사회민주주의 정당처럼 보이도록 치장했다. 이 속임수의 설계자는 에제비트(Ecevit) 총리였다.


1973년 이후, 성장하는 노동운동

1973년에 새로운 선거가 개시되었고, 1974년에 에제비트의 사이비 좌파정당이 정권을 잡았다. 부르주아와 좌파에게 새로운 정치적 국면이 시작되었다. 좌파운동은 이제 수십 개의 새로운 조직으로 완전히 해체되고 분리되었다.


해체된 좌파 사이에는 이데올로기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두 가지 주요 경향이 있었다. 하나는 전통적인 스탈린주의 좌파 경향으로, 노동자계급과 노동조합운동 안에서 조직하는 것을 목표로 했고 소련 공산당의 공식노선을 따랐다. 두 번째는, 혁명적 민중주의 경향으로 학생 청년과 도시와 지방의 소부르주아 사이에 조직되었다. 물론 이 경향의 이데올로기적 출발점 역시 스탈린주의였다. 그들의 정치적 노선은 마오주의와 게릴라주의로 구현되었다.


불행히도 이 시기에 혁명적 맑스주의를 기반으로 조직된 국제주의적 공산주의 경향은 존재하지 않았다. 트로츠키의 사상을 옹호하고 스탈린주의를 비판했던 몇몇 조그마한 지적 서클이 있었음에도, 그들은 좌파 운동 안에서 적극적인 정치 조직도, 심지어 사상의 흐름조차도 형성할 수 없었다. 스탈린주의의 흐름이 터키 좌파운동 안에서 매우 강력했고, “스탈린주의적 국가 사회주의”라는 개념이 사회주의 지식인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수용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터키 좌파 사이에는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강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트로츠키는 “레닌주의의 적”이자 “모험주의자”, “배반자” 등등이었다.


1973년 여러 해 동안 모스크바에 있는 외부조직으로만 존재했던 터키공산당은 터키에 비합법적 기반을 다시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터키공산당에게 거대한 진전이었다. 그러나 비합법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신속하게 늘어나는 대중성을 얻었다. 그 주된 이유는 터키공산당이 그것의 비합법적 조직 외에도 그 주변에 광범위한 합법적 대중운동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혁명적노동조합연맹의 지도부를 장악하는 것을 통해 노동조합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게 가능했다. 1970년과 1980년 사이에 이러한 비합법정당인 터키공산당의 많은 당원들은 많은 노조와 합법적 대중조직의 집행위원회에 선출되도록 애썼다. 동시에 합법적인 청년, 교사, 기술직, 여성단체가 있었는데, 이 단체들은 수만 명의 회원들을 갖고 있었고 직접적으로 당의 통제 아래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도 공장의 노동자로 구성된 수백 개의 비밀 세포조직이 있었다.


터키공산당의 이러한 조직화 방법은 사실상 옳았다. 불행히도, 당의 정치적 노선과 지도부는 완전히 사회개량주의와 계급조화론에 입각해 있었다. 터키공산당의 지도부는 소련 관료들에 의존했고 모스크바에서 정한 노선을 이의제기 없이 따랐다. 당내 분열은 이것의 불가피한 결과였다. 보다 혁명적인 노선을 취하길 바랐던 이들과 개량주의자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그 당시 많은 합법적, 비합법적 사회주의 정당이 형성되었지만, 그 중 어느 정당도 터키공산당이 했던 것만큼 노동자 운동에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1970년과 1980년 사이에 노동계급 운동의 성장은 전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사회주의 사상이 노동계급 안에 퍼지고 있었다. 터키공산당의 지도 아래, 혁명적노동조합연맹은 1976년 노동절을 기념하는 대중시위를 최초로 조직했다. 노동절 집회는 지난 50년간 금지되어왔다. 이것은 거의 전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신에 입각해 진행되었다. 20만 명이 이 집회에 참여했고 노동조합 운동이 파업을 조직했다. 이것은 터키의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파업이었다. 혁명적노동조합연맹의 가장 전투적인 조직인 금속노동조합이 파업을 시작했다. 이것은 사적 부문의 공장 120곳을 아우르는 파업이었고, 4만 명의 노동자들이 동참했으며, 11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이 파업을 둘러싸고 광범위하고 강력한 연대운동이 형성되었다. 파업이 진행된 몇 달 동안 청년 운동, 여성 노동자 운동, 지식인 운동 등등 모두, 파업 중인 노동자들 과 함께 연대하며 파업천막을 지켰다. 파업 참가자들의 가족들은 홀로 남겨져 고립되기는 커녕, 이 모든 집단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터키 부르주아는 이러한 사건들을 두려워했고, 심지어 더 많은 사람들이 다음 노동절 기념식을 지지할 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했다. 이제 산업 및 정치 전망에서 여론은 좌선회하고 있었고, 부르주아는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1977년 5월,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참여한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노동절 기념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부르주아는 이제 대항수단을 취하고 있었다. 노조의 힘이 성장하는 것과 함께 대중들이 좌선회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갖가지 도발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혁명에 반대하는 이러한 행동에서 터키 부르주아는 미국 제국주의의 첩보기관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이 거대한 노동절 시위는 미국과 터키의 첩보기관이 벌인 유혈 도발과 마주했다. 건물로 둘러싸인 50만 명의 시위자들이 콘트라 게릴라 팀의 의도적인 일제사격에 당했다. 총격을 당하거나 특수군 차량에 치여 40명가량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1977년 노동절의 기억은 노동자들과 혁명가들의 마음속에 절대 잊힐 수 없다. 그것은 터키와 미국의 부르주아들이 연대를 보여줬던 노동자들과 혁명가에 대한 학살을 개시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 후 노동절을 기념하는 것은 상황이 어찌되었든 터키의 혁명가들에게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1977년 노동절 이후로 부르주아가 혁명에 대항하는 도발을 강화하면서 정치적 분위기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들은 다시 한 번 군사 쿠데타로 좌경화하는 운동이 성장하는 것을 막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사이비 사회민주주의자 뷜렌트 에제비트와 에제비트의 정당 공화인민당은 반공주의 공격을 시작했다. 에제비트는 이미 혁명적노동조합연맹 내 터키공산당의 영향력을 파괴하고 혁명적노동조합연맹을 진압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 노동자의 지도부와 혁명가들은 여러 도시에서, 특히 노동계급 구역에서 파시스트 민족주의운동당(Nationalist Movement Party, MHP)이 이끈 준군사적인 무장 갱단에게서 공격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혁명적 투쟁과 노동자 운동으로 잘 알려진 인물들을 선택적으로 살해하기 시작했다. 살생부가 파시스트 신문에 출판되고 있었고, 그 곳에는 다음 살인의 목표가 된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 당시 CIA가 훈련시킨 이 콘트라게릴라 군대에 의한 정치적 암살은 중요한 정치적 인물들을 목표로 하기 시작했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완벽한 대중 진압이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그리고 이 혁명에 대항한 군사작전에서 5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결국 그들은 금속노동조합의 지도자이자 혁명적노동조합연맹 위원장이었던 케말 터클러(Kemal Turkler)를 살해했다. 금속노동조합은 터키 노동계급의 주도적 부문이었고, 케말 터클러는 노동계급 전체에 잘 알려진 신뢰받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의 암살은 군사 쿠데타로 향하는 길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의미했다. 이스탄불 안팎에서 온 50만 명이 넘는 조합원·비조합원 노동자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노동계급 운동은 투쟁을 전진시키고 군사 쿠데타에 저항할 진정으로 혁명적인 지도력을 결여하고 있었다. 터키공산당의 관료적 지도부는 부끄럽게도 에제비트 정부와 타협하면서 완전히 항복하는 입장으로 후퇴했다. 터키 공산당은 노동계급을 진정시키는 사제의 역할을 하려 했다.


9월 12일 군사 쿠데타

이러한 불리한 상황 아래, 노동계급운동이 후퇴하면서 1977년 노동절 이후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폭동세력이 의도했던 대로 공포, 평화주의, 소진의 거대한 혼합물이었다. 터키 부르주아는 전차, 대포, 소총으로, 1980년 직전에 격렬해진 경제적 정치적 위기를 통제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980년 9월 12일 터키는 세 번째 군사 쿠데타를 목도했다. 헌법과 의회는 폐지·폐쇄되었고, 부르주아 정당을 비롯한 모든 정당 또한 해산되었다. 정당 지도자들은 체포되었고 혁명적노동조합연맹은 문을 닫았으며, 노동조합원이 체포되고 노동조합이 사인한 모든 단체협약이 무효화되었다. 그 때 노동자의 임금이 동결되었다. 9월 12일 쿠데타에서 군사독재는 수만 명의 사람들을 체포하여, 고문을 진행하였다. 수백 명이 살해당하거나, 교수형에 처해졌고 불구가 되었다. 대략적인 수치는 다음과 같다.


- 65만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그들 중 다수는 고문을 받았다.


- 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정치적 이민자로 유럽 국가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 700명이 사형을 구형받았는데, 그들 중 480명이 사형을 언도받았고, 216명이 의회로부터 형집행정지를 받았으며, 48명이 교수형을 당했다.


- 대략 200명의 사람들이 고문으로 사망했다.


- 23,677개의 단체가 금지되었다.


9월 12일 군사 쿠데타는 떠오르는 노동계급의 좌경화 운동과 좌파 정치운동에 대해 부르주아가 일으킨 반혁명적 대응이었다. 이 파시스트 군사 정권은 단지 부르주아를 곤경으로부터 구출했을 뿐만 아니라, 반동적인 기반 위에 부르주아의 정치적 질서를 재건했다. 그 영향은 여전히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1983년 의회선거 요청으로 군사 정권이 종식되었다는 느낌을 주고 있지만, 실제로 터키에서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노동계급과 좌파에 대한 두려움을 억누르지 못하는 부르주아는 여전히 이른바 의회로 치장함으로써 억압적인 정권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부르주아의 질서를 곤경으로부터 구해내지 못했다. 반대로 그것은 부르주아를 깊은 수렁으로 빠뜨렸다. 이제 부르주아는 이른바 의회정권으로 자국인민도 전세계 인민도 기만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위기 속에서 절망적으로 투쟁하고 있다.


요컨대, 터키는 유럽 국가들이 겪은 과거의 다양한 경험, 노동자 운동의 성장과 몰락, 학살, 파시스트의 공격, 군사 정권 등등을 모두 지난 40년 동안 연속적이고 집중적으로 경험했다. 9월 12일 정권의 목적 중 하나는 80년대까지 일반적이었던 국내시장 지향적인 자본축적 체제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경제 영역에서 군사정권의 상징이었던 “1월 24일 포고”는 수출을 지향하는 새로운 경제적 구조화로 나가는 길을 내주었다. 구조조정을 막는 모든 방해물을 제거한 외잘주의 노선(터키식 대처리즘)은 터키를 제국주의로 통합시키는 많은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 발걸음 중 하나는 여전히 큰 문제로 남아있는 EU 회원가입 문제였다.


터키의 자본주의 발전은 서구의 고전적인 경로와는 다른 경로를 밟았다. 부르주아 공화국의 기초를 세운 것은 문민 정치세력이 아니라 주로 군부 관료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땅의 부르주아 정권은 절대 서구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처럼 작동하지 않았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투쟁 상승에 직면하여 문제를 느낄 때면, 언제든지 부르주아는 군부에 구원을 요청했고 군부 가 최고위를 지배하는 예외적인 형태의 정권에 정치영역을 맡겨 두었다. 부르주아는 1980년대 터키 자본주의의 열띤 구조조정 시기 내내 전통적인 구세주인 군부와 군부파시즘 정권 뒤에 피난하여 자신의 일을 수행할 경우에도 그러했다. 터키의 정치적 삶의 특수성을 구성하는 군부후견 정권은 결코 최근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진부할 정도이다.


고전적 자본주의가 발전한 지역인 서방국가에서, 정치영역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와 그 표현인 시민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형성되었고 봉사했다. 그러나 터키에서 전통적인 부르주아적 정치영역은 일반적으로 시민사회에 적대적이었고, 국가 보호 하에서의 자본주의 발전 과정만을 지지했다. 전제국가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러한 정치양식 및 구조화는 점점 터키 자본주의의 변화하는 욕구와 새롭게 진행 중인 과정에 장애물이 되어 왔다.

이 장애물을 극복해야할 필요성은, 터키 부르주아의 특정 분파가 서구 국가와 비교하여 매우 늦게 문민정치를 옹호하기 시작했던 사실 이면에 존재하는 진정한 동기였다. 터키 자본주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만들 수 없었다는 사실은 고사하고, 동일한 역사적 토대 위에 자유주의적 경향마저 정치영역에서 발전할 기회를 주지 못했다. 사실 부르주아 집단이 논쟁의 형식으로 이 쟁점을 받아들여 추진했던 것은 오로지 1980년 사 건에 뒤이어 등장한 예외적 정권 아래서 구조적인 경제 변화가 일어난 이후였다. 여기서 터키의 진행과정의 측면에 대한 우리의 분석을 상기하는 것이 상당히 적절하다. (보다 폭넓은 이해를 위해 E. Çağlı, Bonapartizmden Faşizme[보나파르티즘에서 파시즘까지]를 보라.)


9월 12일 군부 파시스트 쿠데타에 선행하는 시기를 관찰하면, 우리는 제조업, 상업, 은행업 등의 다양한 요소로 구성된 대부르주아가 이제 더 금융자본의 형성 속에서 강력해졌고 완전하게 확립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80년은 금융자본이 자신의 문어발과 오랫동안 갈구했던 해외 시장을 향한 도약을 통해, 삶의 모든 영역을 자신의 헤게모니 아래로 놓는 상황을 만든 중요한 전환점이다.


이 전환점에서, 대자본은 자신의 방식으로 내부에 거대한 자본주의적 돌파구를 완성하고 해외 시장을 향해 전속력으로 뻗어나가기 위해 장애물을 극복할 강력한 일격을 준비했다. 이제 완전히 자라나 헤게모니를 쥔 금융자본에게, 국내 시장에 기초한 축적 양식에 의해 만들어진 병목현상을 극복하고 구조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세계 자본주의의 후퇴 경향과 맞물려, 오랜 독재적 운영양식에 의해 형성된 터키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가 이제 성숙하였고, 문제의 규모는 해결이 지체되면서 거대한 차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요구와 현존 상황 사이의 극심한 긴장 때문에, 대자본은 경제, 정치 등의 모든 전선에서 공격적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 앞에 놓인 장애물을 치운 1월 24일의 결정을 통해 구조적 변화의 움직임을 시작하는 동시에, 9월 12일 군사정권을 통해 노동계급운동의 성장을 중단시키고 부르주아 질서를 위협하는 혁명적 상황을 종결시킨다는 목표를 추진했다. 9월 12일 파시즘은 회복하기 어려운 심각한 타격이었고, 노동계급이 원자화되고 겁을 먹어 조직된 투쟁을 심각하게 두려워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1980년 9월 12일 이후의 시기


터키의 정치적 삶에서 이미 중요한 존재였던 군부의 역할은 9월 12일 체제수립과 함께 더욱 격렬해지고 강화되었다. 군부관료가 의회체제에 가한 타격과 군부가 시행한 새로운 법률(1982년 헌법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화력을 발휘하고 있다)을 통해, 그들은 정치적 삶에서 군부의 역할을 거의 영원한 것으로 보장할 군부독재의 건설을 목표로 했다. 이러한 상황은 정치에서 군부수장의 지위를 강화시키는 일을 초래했다. 이 상황은 1983년 선거로 군부정권이 외견상 권력을 포기하고 의회에 이양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수년 간 계속되었다.


9월 12일의 유혈 군부독재-서구에선 온건한 군부정권으로 그려졌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해체되기 시작했지만, 그 유산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예를 들어 군부정권이 삽입한 법령은 최근에 몇 차례 헌법 개정이 이뤄졌지만 여전히 기본적으로 시행 중이다.


이 모든 것의 이면에 있는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터키 국가의 군부·전제적 측면이 터키에 속한 쿠르디스탄 지역 쿠르드 인민의 민족해방 투쟁시기 동안 더욱 더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터키군은 쿠르드인들의 민족적 저항에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 동안 3만 명의 쿠르드인들이 살해당했고, 1만 명이 감옥에 갇혔으며, 수천 명이 고문당했다. 쿠르드인 농민 수십만 명이 강제로 자기 땅에서 추방당했으며, 그들의 마을은 불타버렸다. 이들은 대도시로 강제이주를 당하여, 실업과 빈곤에 처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의 바람이 세계를 휩쓸었던 1983년 의회 선거의 결과로 외잘이 경제의 운전대를 잡았다. 그는 당시 총리였고, 1월 24일 결정의 설계자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불가침의 목록이었던 경제규칙들이 상공회의소의 요구에 따라 바뀌었다. 예를 들자면, 터키 통화를 보호하는 법과 같은 민족주의적이고 보호주의적인 정책이 폐지되었고, 대외무역체제는 자유화되었다. 사회가 해체되는 대가를 치르고 외잘 집권기 터키 자본주의는 금융자본의 이해를 따르는 구조적 변화(국제화, 즉 제국주의 체제의 더 큰 통합)를 경험했다.


터키의 독특함에는 아무런 비밀도 없다. 군부수장들이 항상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유럽 국가에서 이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이 군부관료는 항상 정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약화시키려는 부르주아의 민간적인 시도를 정권에 대한 국내적 위협으로 간주했고, 그러한 시도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1980년대 이후의 시기를 고찰해보면, 터키에서 부르주아의 예외적 지배양식이 언제 종결되고 정상적인 부르주아 의회체제가 언제 시작될지 정확히 기술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1983년 이후 우리는 한편으로 의회가 운영되는 일종의 부르주아 지배를, 다른 한편으로 예외적 체제에 의해 성립된 이러한 제도와 실천을 갖고 있다. 그것은 2002년 총선거까지 대체로 기형적인 상태였다. 달리 말하자면, 유럽의 사례와 비교하여 이미 불구가 된 민주주의적 내용을 갖고 있는 터키 의회체제는 9월 12일 체제의 영향 때문에 2002년 10월 3월 선거까지 더욱 불구가 되었다. 그리고 광범위한 인민대중은 이들 정당을 정의개발당(AKP)에 권력을 넘겨줌으로써, 자신들이 국가주의적이고 억압적이며 현상유지적인 세력으로 보았던 이들 정당들에게 교훈을 가르쳐주었다.


이 시점은 지나간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르주아와 상공회의소 같은 대부르주아 조직은 군사정권이 지도하는 파시스트 독재정권과 이후 외잘 집권기의 보나파르트주의 정권의 주요한 후원자였다는 것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이들 세력은 기뻐 복종하며 예외적인 정권이 경제를 개방하고 혁명적 운동과 노동자운동을 억압하는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9월 12일 체제를 논할 때,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이슈가 있다. 터키에서 파시즘의 종결은 스페인, 그리스, 포르투갈, 혹은 몇몇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과정과 유사하지 않다. 이 나라들에서 파시스트 독재정권이 약해졌을 무렵 아래로부터 올라온 타격을 받았다. 터키의 경우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다른 나라에서는 일어났지만 터키에는 결여된 다른 것들도 있었다. 근로대중 운동, 혁명적 봉기, 이러한 상승을 혁명의 길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소생시키기 위한 정치세력의 열정적 동원이 그것이다.


대중이 파시스트 군사 독재를 전복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던 사례들에서, 폭동 주모자들은 저항의 힘으로 법정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터키의 폭동 주모자들은 국가 직책 덕분에 얻은 불룩한 지갑을 가지고 편안한 휴양지에 자리를 자리잡았다.


과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잊지 말아야할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이 있다. 파시스트 정권이 비록 해체되는 과정에 있었지만, 터키의 부르주아 질서는 억압받은 쿠르드 민족의 해방운동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겁 많고 비겁한 터키 부르주아는 민주주의에 대해 말하지 않고, 그들의 신성한 군대가 이 운동을 진압할 것이라는 소망을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그러나 수년간의 유혈 진압정책 덕분에 터키 국가가 억눌러왔던 쿠르드 문제의 부상이, 기존의 모든 정치적 균형과 패러다임을 바꾸었고 역사적·사회적 촉매로서 작용했다.


터키의 정치사에 흔적을 남긴 군부후견정권에 대한 대자본 조직들의 불만은, 이 정권이 그들의 이해관계에 장애물로 작용하기 시작한 이후에야 수면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터키에서 유럽 모델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찬성하는 목소리가 부르주아 사이에서 들리기 시작했던 사실은 이 점을 표현한다. 또한 이러한 지형에서 정치적 자유주의 경향이 번성하였고, 특정 저술가와 출판물이 이 경향을 이끌었다.


대자본 그룹이 민주화를 이야기했을 때, 그들이 의미했던 것은 자신들을 전제국가로부터 구해 내어 바깥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 분위기의 형성이었다는 데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괴사하고 있는 특정한 중요문제에 그들이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지는 이것이 결정한다. 상공회의소 부르주아가 추구하는 “민주화”는 EU를 향하고 있고, 극도로 비일관적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이러한 종류의 계급적 이해가 놓여 있다.


오로지 노동계급, 혁명가, 쿠르드 인민의 투쟁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더 폭넓은 민주주의는 대자본가의 “민주화” 패키지의 내용에서 틀림없이 빠져있다! 그와 반대로 민주적 개방에 대한 대자본가 집단의 태도는 상당히 교활하고 변덕스럽다. 이러한 요구에 대한 대중 투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상공회의소 같은 순수한 대자본가 조직에게 폭넓고 일관된 태도를 기대하는 것은 완전히 부적절하다.


상공회의소는 아직도 교활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고, 반체제 투쟁의 상황과 부르주아 내부의 계속되는 분쟁에서 나오는 정세적 우선순위에 따라 담론을 빈번하게 바꾸었다. 반면 자유주의좌파 칼럼니스트들은 상공회의소에 민주적 개혁조치들에 대해 단호하고 일관적인 태도를 기대한다. 그 러나 지구 어디에도 대자본 조직이 이런 종류의 주제에 대해 그러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이윤을 보장하고 증진하는 한에서만 민주주의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끈질기게 부르주아 민주주의 의제를 주장해온 자유주의좌파 저술가들의 입장과 “민주적 해법”을 둘러싼 대자본 조직의 입장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자유주의좌파들에게, 터키에 서구 모델의 부르주아 의회체제를 낳을 정치적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매우 중요한 원칙의 문제다. 그러나 대자본가에게, 특정 “민주화” 패키지의 수행은 오로지 시간과 상황에 따라 (주로 해외로부터 압력에 따라!) 긴급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좌파의 태도 속에서 강조되고 있는 부정적 측면이 존재한다.


자유주의좌파는 상공회의소 같은 대자본 조직 일부의 민주화 요구에 대해 과신을 설교하면서 노동대중의 의식을 왜곡한다. 민주주의가 대자본에 의해 도래할 수 있다는 환상을 퍼트리는 것은, 노동자뿐 아니라 터키인과 쿠르드인 빈민들에게 더 넓은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싸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호하게 한다. 반면 천성적으로 계급적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대자본은 자유주의좌파가 말하는 것에 그다지 많이 주목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군부후견정권의 해체와 터키 정치지형의 민주화 같은 문제는, 국제적·경제적 긴급상태를 해소하는 욕구와 관련되어있는 대자본의 의제항목이 되었다. 유사하게 쿠르드 문제와 키프로스 문제에 대한 해결을 찾는 것 또한 EU에 가입하거나 미국과의 연합 속에서 중동 내의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려는 터키의 요구 같은 요소들 때문에 대자본의 의제가 되었다.


그러나 2002년 총선거 이전까지 있었던 연이은 부르주아 연합정부들은 이런 문제를 풀지 못했다. 사실 그들은 많은 측면에서 이 문제를 교착상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악화되면서 이러한 문제는 다시 정의개발당이 해결해야할 탁상 위에 놓인 문제가 되었다. 정의개발당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약속으로 2002년 총선거 이후 단독으로 정권을 잡았다. 정의개발당 정부의 첫 번째, 두 번째 임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하는 첫 시기를 건설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설명했듯이, 터키에서 경제와 정치의 관계는 서구 국가와 비교하여 독특한 측면들을 갖고 있다. 역사적 발전 과정을 통해 설명했듯이, 문무관료에 기초한 군부후견정권이 이러한 지형을 형성하고 계속해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상황의 결과로 서구 자본주의 국가와 달리, 군부가 지도하는 터키의 부르주아 정치지형이 경제적 긴급사태와 양립할 수 없는 특수한 한계와 저항의 지점을 만들었다.


전제적·국가주의적 전통 때문에 터키의 지배적인 공식역사는 서구 국가와 비교하여 상당히 달랐다. 심지어 이 나라에서는 부르주아 정치영역에서 이름붙이고 분석하는 것과 관해서도 공식담론과 사실 사이에 심각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공식담론을 보자면 케말주의의 세속주의를 옹호하는 이는 근대적이고 민주적이며 심지어 혁명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수년 간 정치에서 문무관료와 국가정당, 즉 공화인민당이 대표해온 이 노선은 현상유지 우선적이고 정치적으로 반동적이다.


그리고 수년 동안 그들에게 “반동”이라 이름붙인 케말주의 관료들이 계속해서 정치적 삶으로부터 떨어뜨리고자 했던 “중심 바깥의” 분파들이, 군부후견정권의 종결을 원하고 그만큼 자유주의를 수호하는 정치적 조류이자 세력을 형성했다. 게다가 주된 예시로 1950년대의 민주당과 가장 최근의 정의개발당을 들 수 있는, 이러한 특징을 갖는 이 정당들은 압도적 다수표를 받아 부르주아 정권을 형성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현실을 볼 필요가 있다. 사실, 문무관료는 현상유지 우선적이고 반동적이다. 그리고 케말주의의 국가숭배와 전통적인 국가주의 보수파의 반대파에 비해, 정의개발당은 그 명백한 민중주의적인 측면과 함께 자유주의적인 정치적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특징들로 정의개발당은 정치영역에 노출된 공화인민당과 같이 쇠퇴하는 국가주의 정당들을 압도적으로 포위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을 기초로, 정의개발당은 자신을 자유민주주의자로, 그리고 빈민대중의 편에 있는 것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이 모든 현상이 단지 환상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여기에 분명히 해야 하는 사실이 있다. 터키의 군부후견정권이라는 독특한 문제는 그에 기대고 있는 정의개발당과 정치조직의 측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관념과 정치적 자유주의를 결여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의개발당은 노동대중의 대표나 보호자가 아니라, 엄밀한 의미의 부르주아 정당이다. 그리고 초창기 자본의 조직의 이해관계를 외치는 대자본의 진정한 정당은 노동계급의 광범위한 착취라는 기초 위에 번창했다.


이들 초창기 대자본 조직과 그들의 정치적 대변인은 오늘날 대중적인 신오스만주의(neo-Ottomanism)라는 기치 아래 그 지역의 제국주의적 팽창주의를 갈망하는 부르주아 세력을 형성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제국주의적 야망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향수의 공허한 반영으로 간주될 수 없다. 계속되는 지배계급의 내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팽창의 욕망을 지지하는 경제주도세력은 정의개발당 정부가 세계 경제로의 통합을 향한 오랜 길을 계속해서 가게 했다. 정의개발당 정부는 세속주의를 지향하는 대자본의 그룹 일부와 군부후견정권을 지원했던 부류에게 반동적인 반대공격을 받을지라도, 결과적으로 더 큰 규모의 터키 자본주의 전체를 대변하고자 애썼다.


최근 미국의 지배서클이 외쳐왔던 “전략적 협력”의 문제는 터키에게 요구되는 역할의 틀 속에서 진정한 실체를 갖게 되었다. 정의개발당은 이 상황을 그 성공적인 민주화로 보여주고 유지했다. 이러한 태도는 아류제국주의 지위를 강화하려는 터키의 야망을 암시한다.


정의개발당과 그 주변인들(milieu)은 주변부 국가에서 아류제국주의 세력으로 터키가 변화하는 과정을 이제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사실상 이러한 과정은 외잘 시기에 시작되었다. 소련의 붕괴로 시작되어 발칸반도에서 중동, 터키 공화국까지 뻗어가는 새로운 영토분할 전쟁은 지금의 아류제국주의 터키의 팽창계획과 동시에 일어났다. 신오스만주의는 부르주아의 새로운 분파가 이 지역으로 팽창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가면이 되었다.


한때 미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였던 터키는 1960년 이후 과열된 자본주의적 발전의 결과로 중간 규모로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1980년 이후 과열된 구조조정은 임시적인 부르주아 정권 아래서 외부세계를 향한 개방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 정권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억눌러 자본에게 거의 문제없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그 결과 터키는 중간 규 모의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로 올라왔고, 아류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터키와 같은 자본주의 국가가 자본주의의 지구적 작동 안에서 겪은 변화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의존에도 불구하고 터키는 이제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성장한 아류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이 변화과정의 결과, 터키 부르주아는 허물을 벗는 고통을 경험해왔다. 오랫동안 계속되어온 부르주아 권력블록 사이의 분열이 이것을 반영한다. 오늘날 터키 부르주아는 터키정치와 세계정치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인지와 그에 따라 부합하는 정치적 태도의 발전이란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두 세력으로 나뉘어 있다.




경제적 기초와 경제적 필요가 궁극적인 분석에서 결정적이라는 일반적인 법칙은 의심할 여지없다. 그러나 터키의 전통적인 정치적 표면을 깨부수고 세계경제와 양립가능한 새로운 정치지형을 만드는 일은, 극도로 뒤늦고 문제 많으며 복잡한 과정 속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몇 가지 결론이 된 지점을 통해 이러한 길의 발전을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경제적 동기가 지난 시기의 터키에 강력한 제약을 놓았을지라도 정치적 부문의 긴장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군부후견정권을 지지하는 정당이 객관적으로 토대를 잃고 있는 중이라도, 그들과 탈군부화(demilitarisation)를 지지하는 자유주의 세력 사이의 정치적 내분은 아직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다.


두 번째, 터키 현실을 고려해 볼 때 자유주의좌파 등과 같이 정치영역에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정치적 세력이 있다는 점은 나쁜 것만 아니라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궁극적으로 부르주아의 틀을 넘어서지 못한다.


세 번째, 수년 간 군부후견정권의 직접적인 통제와 간접적인 그림자 아래 있었던 정치적 지형에 대하여 부르주아적 의미에서 정상화를 요구하는 것은 긍정적인 발걸음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좌파가 그것을 과장된 방식으로, 예를 들어 “시민 혁명”, “민주주의 혁명” 등을 떠드는 식으로 드러내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네 번째, 그러한 변화가 터키 현실을 고려해 볼 때 긍정적일지라도, 이것이 극도로 뒤늦은 것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자본주의가 공황에 흔들리고 그렇기에 전통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틀조차 협소해지는 세계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부드럽게 작동한다는 환상을 만드는 것은 극도로 위험하다.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터키의 의제로 끌어들여졌고 정의개발당 정부가 요구하는 “민주화”는 자유주의좌파의 위치와 더 넓게는 세계적으로 나가려는 대자본의 욕구에서 나온 동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필요한 것은, 노동계급, 근로대중, 쿠르드 빈민 등의 혁명적 투쟁에서 자신의 존재이유(raison d’etre), 정당성, 힘을 얻은 민주주의 투쟁이다. 게다가 우리가 모든 경우에서 강조하듯이, 종류와 내용과 무관하게, 조직된 투쟁을 통해 성취되고 보호된 이러한 성과만이 지속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