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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매트 스와글러, 왜 아프리카에서 러시아혁명은 중요했는가? 1부

원제: Did the Russian Revolution Matter for Africa? (Part I)



2부로 나뉜 포스트 중 1부에서, 매트 스와글러는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뒤 첫 몇 년(1917-1935년)을 살펴보며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아프리카 해방운동에 러시아혁명이 미친 영향력을 논의한다. 2부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년 동안 아프리카의 정치, 개발, 운동에 소련이 미친 영향력을 살펴볼 것이다.

1922년 모스크바, 코민테른 제4차 대회에서 연설하는 클로드 맥케이


러시아 노동자와 소수민족의 전위는 이제 제국의 억압에서 해방되어, 나머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에서 억압받는 계급들과 탄압받는 소수민족과 소수인종의 운명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이런 사람들의 영혼의 친족이라고 느낀다. 그들은 친족들을 자유롭게 하도록 돕고 싶어 한다.


—클로드 맥케이(Claude McKay), 위기(The Crisis) 1923년 12월 호.


반제국주의 혁명으로서 러시아혁명

1917년 러시아혁명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선출된 노동자, 군인, 농민 위원회가 주요한 세계제국 한 곳에서 —엄청난 폭력 없이— 국가권력을 장악하였다. 러시아혁명의 뿌리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야기한 학살과 궁핍에 대한 반대가 있었다. 세계대전은 유럽 경쟁국 사이에 경제적, 제국적 경쟁의 폭발을 드러냈고, 그러한 경쟁은 이전부터 수십년 동안 이루어진 아프리카 식민화에 기름을 부었다. 그에 따라, 독일의 식민지들은 승전한 연합국에게 전리품으로 나누어 졌다. 영국, 프랑스, 벨기에, 남아프리카연방, 포르투갈은 모두 표면상으로는 국제연맹의 감독 아래서 아프리카 영토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주도하는 러시아혁명정부는 놀랍게도 반대방향으로 움직였다. 이전의 러시아 제국이 갖고 있던 영토에 대한 모든 권리를 즉각 포기했고, 네 달 뒤에는 독일과의 종전을 협상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뒤이어 독일이 패배하면서, 발트삼국처럼 독일점령 아래에 있던 과거 러시아 제국의 구역은 독립하게 되었다.

연합국은 혁명의 목표에 공개적으로 적대적이었고, 러시아에 반동세력에 합류할 군대를 보내어 러시아를 5년 간의 내전으로 내몰았다. 볼셰비키의 지도자들은 결과적으로 승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세계 다른 곳에서 비슷한 혁명이 승리하기 전까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사회를 확립하려는 어떤 시도든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적, 군사적 힘에 의해 옭죄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회적 불안이 전쟁으로 무너진 유럽 전역을 휩쓴다면, 더 진전된 혁명의 가능성은 현실이 될 것이다.



식민주의와 자본주의에 맞선 전지구적 운동: 코민테른

1919년에 한 대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렸고, 새로운 조직체인 코민테른이 만들어졌다. 코민테른은 혁명적 사회주의와 반제국주의에 헌신하는 지구 각지의 조직들을 조정하는 것을 목표하였다. 다음 해에, 코민테른 대회는 여러 가입조항에 동의하였고, 그 조항 중 하나는 제국의 식민 본국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 조직들—이제 자신을 공산주의라 부르는 이들—을 향한 것이었다.


[그와 같은 당은] … 다음의 의무를 갖는다. 식민지에서 자국의 제국주의자들의 술수를 폭로하고,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식민지에서의 모든 해방운동을 지지한다. 그들의 제국주의 동포들은 식민지를 전복할 것을 요구한다. 자국 노동자들의 마음 속에 식민지의 노동자 대중과 억압받는 민족과의 진정으로 우애적인 관계를 구축한다. 자국 군대 안에서 식민지 인민들의 억압에 반대하는 체계적인 선전을 수행한다. 


이러한 입장은 제국주의 지배가 식민 본국에서 자본주의가 생존하고 성장하는 데에 핵심적이라는 점을 동의한 것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유럽의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과 미국)은 “자국의” 혁명적 운동만이 아니라 식민지의 대중투쟁에 의해서도 혁명으로 전복될 수 있다.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은 1920년 코민테른 대회를 준비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자본주의 유럽세력은 식민지 착취를 위한 광범위한 영역을 통제하지 않는다면, 짧은 시간 동안조차 그들의 생존을 유지할 수 없다.”

하지만 코민테른의 지지자들은 모든 반식민 운동을 지지해야 하는가? 레닌은 긍정으로 답변했지만, 인도의 마르크스주의자 M. N. 로이(M. N. Roy)는 그러한 입장이 정치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이 반동적인 반식민 혹은 민족주의 지도자들에게 가림막을 줄 수 있다고 반박했다. 대신 로이는 식민지의 노동자 농민 운동의 목적이 사회주의적 목표로 수렴하며 따라서 식민지에서의 운동을 지지할 것을 요청했다. 로이의 입장이 1920년 대회에서 받아들여졌고 —실천적으로 “반동적” 반식민 운동과 “혁명적” 반식민 운동 사이의 구별이 항상 그렇게 뚜렷했던 것은 아니지만— 식민지 영토에서 조직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초기 코민테른 논쟁들은 궁극적으로 아프리카의 반식민 조류들의 발전에 핵심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기까지 유럽 국가들은 아프리카 대륙 대부분을 통제했고, 식민정복에 맞선 아프리카의 봉기의 최초의 물결은 대개 탄압받아왔다.

하지만 세계대전은 아프리카인들이 늘어난 조세, 강제노역, 50만이 넘는 아프리카인들의 식민지 군대로의 징집에 맞서 새롭게 저항하도록 박차를 가했다. 이러한 저항은 경우에 따라 효과적이었지만, 대개는 매우 국지적이었고 단명하였다—부분적으로는 가혹한 탄압 때문이었다. 1917년에 남아프리카 국제사회주의연맹(South African International Socialist League)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한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이었다. 남아프리카 국제사회주의연맹은 제1차 세계대전을 반대해왔고, 남아프리카연방에서 T. W. 티비디(T. W. Thibedi), 조니 고머스(Johnny Gomas), 해밀턴 크라이(Hamilton Kraai)가 이끄는 최초의 흑인 노동조합을 형성했다.

하지만 러시아혁명과 코민테른의 행동은 곧 아프리카 및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의 더 많은 흑인 지식인과 노동자로부터 주목을 끌었다. 러시아혁명은 이후 수십년 동안 식민지해방과 인종해방에 관한 논쟁에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중요하다는 점을 굳건히 했다. 코민테른은 아프리카의 완전한 독립을 요청했다—이러한 요청은 그 당시에 다른 국제조직 두 곳, W. E. B. 두 보이스(W. E. B. Du Bois)의 범아프리카회의(Pan-African Congresses)와 마커스 가비(Marcus Garvey)의 세계흑인지위향상협회(United Negro Improvement Association, UNIA)만이 제기한 입장이었다. 코민테른 지도자들은 이 두 조직의 범아프리카적 틀을 공유하고 있었으나, 식민지배로부터 아프리카를 해방하는 투쟁과 제국주의 나라에서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의 운명은 완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독특하게 받아들였다.



공산주의적 범아프리카주의: 클로드 맥케이부터 라미네 상고르까지

코민테른은 1922년 제4차 대회에서 범아프리카적 관점을 받아들였다. 미국에서 온 두 명의 흑인 마르크스주의자 클로드 맥케이와 오토 하위스바우드(Otto Huiswoud)가 “흑인 위원회(Negro Commission)”를 이끌었고, 하위스바우드가 쓴 것으로 보이는 “흑인 문제에 관한 테제(Thesis on the Negro Question)”가 대회 대표단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그 성명은 식민주의와 인종주의가 자본주의의 생존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공산주의 운동이 미국, 카리브해 지역, 남아메리카, 아프리카의 흑인 투쟁과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일이 핵심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코민테른은 또한 하위스바우드가 이끄는 “흑인국(Negro Bureau)”을 창설하여,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디아스포라 사이에 뿌리를 확립하려 하였다.

맥케이와 하위스바우드가 제안한 범아프리카 틀은 부분적으로 두 보이스와 가비의 영향력에 대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 틀은 마찬가지로, 식민주의와 인종주의가 국제적인 규모로 얽혀 있으며 그러므로 국제적인 규모에서 그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코민테른의 확립된 입장과 맞았다. 미국의 흑인 공산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전략을 발전시키는 데에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러벳 포트-화이트맨(Lovett Fort-Whiteman) 등 몇명은 범아프리카 회담을 조직하려는 목표를 갖고, 1920년대 중반에 아프리카인 학생 및 노동자 대표자들과의 교류를 발전시키려 모색하였다. 그러한 프로젝트를 코민테른이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에 모임은 실현되지 않았다. 하지만 1927년에 독일의 공산주의자 집단은 식민지독립을 위한 반제국주의연맹(League Against Imperialism and for Colonial Independnce, LAI, 이하 반제국주의연맹) 창립대회를 위한 조직화를 주도하였고, 그 대회는 프랑스와 남아프리카연방의 아프리카인 활동가로 이루어진 소규모 집단을 비롯한 170명의 대표단을 브뤼셀로 보냈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세네갈 공산주의자인 라미네 상고르(Lamine Senghor)는 창립대회에서 식민주의와, 전쟁 후의 아프리카 병사들에 대한 부당대우, 프랑스의 아프리카 ”문명화” 임무의 참혹한 경험을 매우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상고르 본인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유럽 전장에서 프랑스군에서 싸웠다. 그는 1921년 프랑스로 돌아왔고, 많은 아프리카 참전용사들처럼 프랑스 정부에 배신을 당했다고 느꼈다. 장애를 갖게 된 아프리카 병사들은 식민 본국의 병사들이 받은 연금보다 적은 액수를 받았고, 프랑스 정부는 아프리카 병사들의 정치적 권리를 확대하겠다는 많은 약속들을 얼버무렸다. 상고르는 1924년에 프랑스공산당과 그와 밀접히 연관된 프랑스 식민지 출신 급진주의자들의 조직인 식민지간연합(Union Intercoloniale, UIC)에 가입한다. 상고르는 곧 UIC를 대표하여 저술과 연설을 시작했고, 다음 해에 파리 지방선거에서 프랑스공산당 후보자로 나섰다.

그러나 상고르와 다른 흑인 프랑스공산당 당원들은, 프랑스공산당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주의에 거의 관심을 주지 않고 있으며 흑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조직하라는 코민테른의 지령도 무시한다는 혐의를 종종 제기하였다. 그 결과, 상고르는 카리브해 지역 출신 공산주의자들과 또다른 서부 아프리카의 공산주의자 티모코 가란 쿠야테(Tiemoko Garan Kouyaté)와 함께 흑인종권익보호위원회(Comité de Défence de la Race Nègre, CDRN)와 그 후신 조직인 흑인종권익보호연맹(Ligue de la Défence de la Race Nègre, LDRN)을 형성하고 이끌기 시작했다. 두 조직은 프랑스 식민지배를 종식시키고 “흑인 인종의 완전한 해방”을 위해 활동하는 데에 전념했다. 흑인종보호위원회와 흑인종보호연맹의 지도자들이 프랑스공산당 출신이었으나, 그들은 파리와 프랑스의 여러 항구도시에서 수백 명의 회원을 모아 신규 조직의 자율성을 유지하려 시도했다. 비록 식민지에서 그들의 신문은 발행금지를 당하였으나, 그들은 동조적인 아프리카인 선원들을 통해 서부 아프리카 항구도시에서 자신들의 출판물을 배포하고 접촉을 확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고르와 쿠야테가 프랑스공산당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었지만, 계속 공산주의 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역사가 하킴 아디(Hakim Adi)가 기록하듯이, 1920년대에 미국, 프랑스, 영국, 남아프리카연방의 공산당에서 흑인 활동가들은 종종 자국의 공산당이 제국주의와 반흑인 인종주의에 맞서 불충분하게 투쟁한다는 혐의를 제기했다. 많은 경우, 흑인 공산주의자들은 코민테른 지도자들에게 직접 그들의 불만을 내보였으며, 지도자들은 그들의 불평을 진지하게 고려하여, 주기적으로 한 국가의 공산당 지도자들을 그들의 “백인우월주의”을 꾸짖었다. 가끔씩, 흑인 공산주의자들과 코민테른 관료들의 노력은, 프랑스공산당과 같은 정당들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더욱 집중하도록 움직였다. 1929년에 흑인종보호연맹과 프랑스공산당은 중부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에서 강제노역에 대응하여 시작한 바야족(Gbaya) 반란을 지지하는 합동캠페인에 착수했다. 그러므로 1920년대에 많은 흑인 공산주의자들과 아프리카인 공산주의자들은 코민테른에 헌신적이었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동시에 맞서 싸우는 일의 중요하다는 점에 열성적이었다. 상고르는 1927년 반제국주의연맹 대회에서 연설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제국주의 억압, 즉 우리가 자국에서 식민화라고 부르고, 여기서 당신들이 제국주의라고 명명한 것은, 하나이고 동일한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자본주의로부터 나오지요. …. 그러므로 식민 억압 아래서 고통을 겪는 이들은 반드시 주도적 국가의 제국주의 아래서 고통을 겪는 이들과 손을 잡고 그들의 편에 서야합니다. 같은 무기로 싸우고, 지구의 재앙, 세계제국주의를 분쇄합시다! 그것은 반드시 분쇄되어 자유인들의 연합으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더 이상 노예제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상고르의 연설은 미국을 비롯하여 국제적으로 여러 신문에 실렸고, 그는 프랑스로 돌아오던 중 체포되어 감금되었다. 상고르는 곧 석방되었으나 —전쟁 동안 독가스 공격을 겪은 탓에— 같은 해에 결핵으로 쓰러졌다. 상고르가 비극적으로 단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경험은 같은 시대에 많은 여타 흑인 급진주의자들과 비슷하였고, 그들이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것은 매우 고무적이었고 종종 절망적이기도 했다.



새로운 범아프리카적 계획: 흑인노동자 국제노동조합위원회

1928년에 코민테른은 흑인 공산주의자들이 자국의 공산당의 활동에 비판을 제기한 점에 대응하여, 새로운 조직체를 만들었다. 바로 흑인노동자 국제노동조합위원회(International Trade Union Committee of Negro Workers, ITUCNW)였다. 흑인노동자 국제노동조합위원회가 명백히 흑인 노동자들을 지향했던 점은 미국과 남아프리카연방에서 흑인 노동계급의 인구학적, 경제적 중요성이 늘어나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카리브해 지역과 서부 아프리카에서 파업이 발발한 것에 반응했기 때문이었다. 아프리카의 노동조합들은 그 당시에 식민 행정부에 의해 금지되었으나, 광부, 철도노동자, 다른 이들에 의한 여러 차례의 파업은 여전히 종전 이후 십년 동안, 오늘날의 세네갈, 가나, 감비아, 시에라리온,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연방 지역에서 일어났다.

흑인노동자 국제노동조합위원회는 유럽에 본부를 두고 있으나, 제임스 포드(James Ford), 조지 패드모어(George Padmore), 오토 하위스바우드와 헤르미나 하위스바우드(Hermina Huiswoud) 부부 등 일련의 미국 흑인 노동자들이 조직을 이끌었다. 그들은 또다른 미국의 흑인 공산주의자 윌리엄 패터슨(William Patterson)과 함께 1930년 함부르크에서 열린 제1차 흑인노동자 국제회의의 주요 조직가였다. 회의는 결과적으로 서부 아프리카, 유럽, 카리브해 지역, 미국에서 17명의 대표단을 끌아모았다. 회의참석은 특히 전지구적인 경제침체 동안 세계 전역의 대표단을 모으는 계획을 실행하는 난제 때문에 방해되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참석 희망자들은 그들의 정치 활동으로 인해 여행금지를 당했다—남아프리카연방의 아프리카인 대표단의 경우였다.

아마도 회의 자체보다 더욱 중요했던 것은 포드, 패터슨 패드모어, 하위스바우드 부부가 사전에 했던 광범위하게 여행하면서 아프리카와,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의 노동활동가과 닿으려 시도했다는 점일 것이다. 감비아 수도에서 노동활동가 E. F. 스몰(E. F. Small)은 1929년에 영국령 식민지에서 파업을 주도하였고, 그 파업은 노동조합의 합법화를 야기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파업은 영국의 공산주의자들과 흑인 활동가들의 광범위한 연대를 받았고, 패터슨은 런던에서 스몰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뒤 패드모어는 서부 아프리카에서 스몰과의 교류를 시작으로 세네갈, 시에라리온, 나이지이라, 라이베리아, 골드코스트(지금의 가나)를 여행하며 흑인노동자 국제노동조합위원회와 그 출판물, 코민테른에 대한 직접적인 연결점을 발전시켰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패드모어는 흑인노동자 국제노동조합위원회를 주도했으며, 지칠 줄 모르고 아프리카와 카리브해 지역과의 접촉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세계 전역에서 흑인 노동자들의 투쟁을 광범위하게 기록하였다. 이 시기 동안, 흑인노동자 국제노동조합위원회는 스코츠버러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된 두 소년(Scottsboro Boys)과, 혐의를 받은 두 아들의 어머니의 유럽여행을 지지하며 연대시위와 언론보도를 조정하였다. 흑인노동자 국제노동조합위원회의 기관지인 『흑인 노동자』(Negro Worker)는 경우에 따라 비합법 조건에서 서부 아프리카 지역과 남아프리카연방의 지지자들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배포되었다. 그러나 패드모어의 노력은 1933년에 나치당이 부상하고 흑인노동자 국제노동조합위원회 독일본부에서 그가 추방당하면서 가로막혔다. 그 여파로 인해 패드모어는 코민테른과 공개적으로 사이가 틀어졌다. 패드모어의 절연으로 이어진 구체적인 상황은 복잡하고 논쟁적이지만, 1920년대 말부터 코민테른에서 일어난 변화들이 그 상황을 뒷받침한다.




스탈린 이후: 코민테른의 방향전환과 남아프리카의 사례

1920년대 후반까지, 러시아혁명을 따라 유럽과 중국을 휩쓸었던 노동자 혁명은 패배하였다. 코민테른의 초기 지도자들이 두려워했듯이 소련은 여전히 고립되어 있었다.

1920년대 말까지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을 둘러싼 관료제가 소비에트 국가의 통제권을 얻었고 반대파를 제거했다—가장 중요하게는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가 제거되었다. 1924년 초에 레닌이 사망한 뒤, 니콜라이 부하린(Nicolai Bukharin, 1926-28년 코민테른 의장 재직)은 코민테른 활동의 기초를 둔 기본 원칙들을 뒤집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한 나라라는 한계 속에서 사회주의 사회를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코민테른을 창립하였으나, 부하린과 스탈린은 정반대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바로, 소련은 자본주의라는 바다에서 사회주의라는 섬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코민테른의 활동은 a) 지구 여기저기의 공산당 지도부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여타 반대파들을 축출하고 b) 소련을 지배하는 새로운 관료제에게 안전한 국제외교환경을 확립하는 것을 지향하기 시작했다.

부하린과 스탈린이 코민테른의 초기 원칙들을 포기했던 점은 패드모어와 같은 활동가들을 밖으로 밀어냈다. 이러한 변화는 막 날갯짓을 하던 남아프리카공산당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미국을 제외하면, 코민테른에서 이루어진 인종주의와 흑인해방에 관한 매우 격렬한 논쟁들은 남아프리카를 고려하고 있었다. 남아프리카공산당은 이전의 뿌리를 흑인 노동자를 조직하는 데에 두고 있었으나, 활동 초창기에는 백인노동자들을 초점에 두고 있었다. 이 점은 1920년대를 거치는 동안 1922년 코민테른의 “흑인문제에 관한 테제”와 남아프리카의 주도적인 흑인 공산주의자들—그리고 미국의 흑인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에서 선례를 받아들이면서 바뀌었다. 흑인 노동계급은 1920년대 동안 남아프리카의 광산과 도시지역에서 빠르게 늘어났다. 많은 이들은 원주민토지법(Native Lands Act)의 시행으로 인해 임금노동으로 내몰렸고, 그에 따라 전체 토착민 인구 중 많은 수가 “원주민 보호구역”의 토지만을 소유하거나 빌리도록 허용되었다—보호구역은 남아프리카연방의 토지구역의 단 7퍼센트만을 차지한다. 그 결과, 남아프리카연방의 소도시에 거주하는 아프리카인의 수는 1921년과 1936년 사이의 시기에 두 배로 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산업 · 상업노동조합(Industrial and Commercial Workers Union, ICU)이 빠르게 성장하여 최초로 흑인 노동자를 위한 전국적인 대규모 노동조합이 되었다. 공산당은 산업 · 상업노동조합과 매우 가까워져서, 두 명의 “유색인” 공산주의자인 제임스 라 구마(James La Guma)와 존 고마스(John Gomas)가 두 조직의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1926년에 라 구마와 다른 공산주의자들이 산업 · 상업노동조합에서 내쫓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장하던 아프리카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ANC)와 함께 계속해서 활동해왔다. 1928년까지 남아프리카공산당에 1600명의 아프리카인 당원이 있었고, 그들이 당원의 다수를 구성하였다. 지도부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점점 늘어나 1929년에 앨버트 은줄라(Albert Nzula)가 총서기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7-28년의 코민테른의 결정안은 남아프리카공산당을 분열시켰고 심각한 결과를 야기했다. 라 구마가 모스크바에 방문한 뒤, 부하린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남아프리카공산당이 “모든 소수민족의 온전한 자치권을 지닌 노동자 농민 공화국을 향한 단계로서, 독립적인 흑인 남아프리카연방”에 관한 요구를 제기할 것을 지시했다. “원주민 공화국” 혹은 “흑인 공화국” 테제는 코민테른에 있던 미국의 흑인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나, 처음에 대부분의 남아프리카공산당 흑인 및 백인 지도자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테제의 지지자들은 흑인공화국 테제가 남아프리카공산당을 오래 남아있던 “백인우월주의”에 대처하도록 하고, 원주민보호구역으로의 강제 재정착에 저항하는 대규모 흑인 농촌대중을 조직화하는 일에 다시 초점을 맞추도록 만들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남아프리카공산당 지도부를 향한 몇 가지 혐의제기는 정확하였으나, “원주민 공화국” 테제는 여러 납득할 수 있는 이유로 인해 논란이 많았다. 첫번째로, 원주민토지법을 통한 토지 강탈은 광산과 도시지역에서 일자리를 찾는 무토지 대중을 형성하여, 아프리카 대중을 매우 프롤레타리아트화 하도록 추동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몇몇 남아프리카 공산주의자들은 인종차별의 철폐가 점차 흑인들이 주도해가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노동계급의 싸움으로 추동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게다가 “원주민 공화국”은 사회주의가 가능해지기 전까지 달성되어야 할 발전 ”단계”로 인식되었다. 1920년대 후반까지, 소련 지도자들은 “2단계” 관점과 유사한 아프리카와 여타 피식민 세계의 일부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점점 명령하였다. 남아프리카연방이 (그리고 다른 식민지는) 자본주의적 발전 시기를 (비록 “흑인 주도 공화국”일지라도) 먼저 거쳐야 한다는 사고는, 초기 코민테른 회담에서 레닌과 트로츠키가 내놓은 입장과 정반대로 향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모스크바의 새로운 노선은 공산주의자들이 더욱 보수적인 민족주의 조직의 지도부에 복종하도록 야기했다—이것은 1925-27년에 중국에서도 일어났고, 중국 노동계급에게 재앙적인 결과를 남겼다. 이러한 맥락에서 “원주민 공화국” 테제는 이후에 (1935년 코민테른이 공식적으로 포기하였음에도) 남아프리카연방에서 아파르트헤이트를 다수 흑인의 지배로 대체한다는 기치 아래에 남아프리카공산당이 아프리카민족회의와 오랫동안 연합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 기치의 승리는 1994년에 처음으로 다인종 선거가 치러졌을 때 일어났다. 하지만 이러한 전환으로 수혜를 입은 흑인 엘리트의 소수 인구를 빼놓는다면, 지난 23년 동안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종에 따른 경제 불평등은 오로지 깊어져만 갔을 뿐이다.

1920년대 후반 코민테른의 남아프리카공산당 개입의 장기적 영향이 무엇이든 간에, 그 개입의 즉각적인 영향은 남아프리카공산당을 분파주의로 추락시켰다. 한편으로 남아프리카공산당이 “원주민 공화국”의 슬로건을 제1의 “단계”로서 제시하였지만, 코민테른 지도부 또한 남아프리카공산당을 종파주의로 내몰아 자신들만의 흑인 노동조합을 형성하려 시도하도록 야기했다. 그 프로젝트는 실패하였고, 남아프리카공산당은 1930년대 초반에 파업과 통행증 소각 시위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 노동계급으로부터 고립되었다. 코민테른의 지지를 받는 흑인 및 백인 지도자를 추방하는 물결이 있었고, 1933년에 당원수는 단 5년 전에 비해 대략 십 분의 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공산당의 쇠락에는 다른 원인들이 있었다. 남아프리카 총리 J. B. M. 헤르초크(J. B. M. Hertzog)이 1920년대 후반에 반공주의 캠페인을 추진하면서, “볼셰비즘”을 흑인 반란의 증가와 연결지었다. 그로 야기된 아프리카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체포와 감금 또한 남아프리카공산당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에티오피아와 제2차 세계대전의 개시

코민테른이 퇴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에 아프리카 대륙에서 공산주의 운동 활동가들이 주도한 캠페인들은 여전히 중요했다. 1935년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으로 아프리카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전조였다. 가혹한 점령은 결과적으로 수십만 명의 에티오피아인들의 삶을 앗아갔고, 즉각적으로 국제적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미국과 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은 할렘에서 아크리까지의 다른 범아프리카적, 반식민지, 반파시즘 활동가들을 따라 연대활동에 합류했다. 케이프타운과 더반의 항구노동자들은 이탈리아군에게 향하는 식량을 선박에 싣기를 거부하였다. 그 행동은 흑인 항만노동자들에게 남아프리카공산당이 했던 호소에 따른 것이었다. 남아프리카공산당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점령에 대한 타격은 또한 남아프리카 백인 지배에 대한 타격이라고 주장하였다.

골드코스트에서는, 모스크바에서 수학해온 코민테른 지지자인 I. T. A. 월러스-존슨(I. T. A Wallace-Johnson)과 뱅콜 아우너-레너(Bankole Awooner-Renner)가 1934년에 서부아프리카청년연맹(West African Youth League, WAYL)을 창설하였다. 그 해 이전에, 월러스-존슨은 스코츠버러 소년 사건에 대한 연대회의를 조직해왔다. 1935년에 서부아프리카청년연맹은 아크라에서 에티오피아 침공에 반대하는 천 명의 행렬을 조직하였으며 에티오피아인들의 저항을 위한 기금을 조달하였다. 그리고 월러스-존슨은 식민지법에 도전하였고 유럽 식민주의의 범죄에 관해 방대한 글을 썼으며, 그로 인해 그는 체포되었으며 영국령 서부 아프리카에서 반공주의 법률이 통과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하였고 스코츠버러 소년 사건의 연대행동과 많이 유사했던 “아비시니아의 손길들”(Hands of Abyssinia) 위원회는, 1930년대에 공산주의 운동이 반인종주의와 범아프리카적 연대에 근거하여 진정으로 전지구적인 캠페인을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표시였다. 이 당시까지 가비의 세계흑인지위향상협회는 급격히 침체하였고, 범아프리카회의는 정지상태였다. 그러므로 전간기의 많은 시기 동안, 코민테른은 지속적으로 아프리카의 흑인 급진주의자들을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의 급진주의자들과 연결시키려 노력한 유일하게 진정한 국제운동이었다. 흑인 공산주의자들은 여러 난제—국가탄압이든, 동지들의 “백인우월주의”이든—에 마주하였으나, 아프리카 대륙 안팎에서 아프리카 독립 요구를 제기하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스탈린주의, 외교, 제국주의

하지만 1930년대 중반까지, 스탈린 정권은 견고해졌다. 스탈린은 독일과의 전쟁이 다가올 것을 예견하였고, 파시즘과 싸운다는 명목에서 프랑스 정부와 영국 정부와의 동맹을 모색했다. 이제 코민테른은 스탈린의 외교적 필요에 봉사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프랑스와 영국의 공산당만이 아니라 프랑스 및 영국 제국령에 있던 여러 공산당은 소련의 동맹이 될 국가를 해치지 않도록 식민지 독립 요구를 억누르도록 지시받았다. 1939년에 스탈린은 프랑스와 영국과의 화해가 실패할까 두려워하자 갑작스레 나치독일과의 불가침조약에 서명하였고, 공산주의 운동을 위기 속으로 던져버렸다. 독일이 1941년에 소련을 공격했을 때서야, 스탈린은 다시 입장을 바꾸어 연합국에 합류하였다. 이 시기에 코민테른은 완전히 해체되었고(1943년), 코민테른의 해체는 한때 러시아혁명을 파괴하려 모색해왔던 주요 자본주의 강대국과 화해하려 더 나아간 제스쳐였다.

코민테른의 최후와, 1930년대 동안 스탈린의 외교정책에서 터무니없는 번복은 많은 흑인 활동가들이 공산주의운동을 포기하도록 야기하였다. 심한 경우, 러벳 포트-화이트먼과 아마도 앨버트 은줄라 등 몇명은 소련에서 스탈린의 반대파 유혈숙청으로 희생되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과 여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파시즘과 싸우는 데에 했던 최종적인 역할과 그 직후에 차세대 좌파정당이 보여준 대중성은 새로운 세대의 아프리카 급진주의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아프리카의 반식민운동이 전쟁 이후 몇 십 년 동안 성장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소련, 러시아혁명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더욱 폭넓은 준거점이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