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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매트 스와글러, 왜 아프리카에서 러시아혁명은 중요했는가? 2부

원제: Did the Russian Revolution Matter for Africa? (Part I)




매트 스와글러는 러시아혁명을 다룬 포스트 중 2부에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어떻게 194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동안까지 아프리카의 정치조직화에 중심적이게 되었는지에 초점을 둔다—그러한 조직화는 소련이 새로운 전지구적 초강대국으로 등장하던 같은 시기에 일어난 발전이었다. 스와글러는 작년 roape.net에 포스팅한 1부에서 1917년 러시아혁명이 아프리카에 중요한 파급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주로 아메리카 대륙의 흑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아프리카 대륙의 노동조합 활동가 및 반식민 명망가 사이에 새로운 연결점을 형성하였다. 그는 2부에서, 어떻게 소련(과 소련의 공산주의 독트린)이 아프리카에 매우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기 시작했던 것이, 정확히 1917년 러시아혁명의 놀랍도록 해방적인 가능성이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규모 국가폭력 캠페인에 의해 지워졌을 때일 수 있었는지 살펴본다. 그럼에도 남겨진 것—소련의 강압적인 국가주도 경제발전 모델—은 신생독립국을 조직했던 많은 떠오르는 아프리카 지도자들에게 호소력 있었다.

1958년 10월 타슈켄트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Afro-Asian Writers Conference)에 참석한 [왼쪽부터―역자주] W. E. B. 두 보이스와 셜리 그레이엄 두 보이스(Shirley Graham Du Bois) 부부, 마제무 디오(Majhemout Diop), 저우양(周扬)과 마오둔(茅盾).


이 글의 1부는 1917년 러시아혁명이 아프리카에 중요한 파급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주로 아메리카 대륙의 흑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아프리카 대륙의 노동조합 활동가 및 반식민 명망가 사이에 새로운 연결점을 형성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연결고리는 주로 1919년에 창설된 국제조직인 코민테른(Comintern)을 통해 형성되었다. 코민테른은 지구 전역에 있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활동을 조정하려 하였다. 초기 몇 년 동안의 코민테른에서 여러 대표들은 자본주의의 패배가 전지구적 규모에서 제국주의와 인종주의에 동시적으로 투쟁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1부에서 개괄하였듯이, 코민테른은 아프리카의 유럽식민주의를 약화시키는 것을 목표하는 다양한 범아프리카적 계획들을 지원하였다—그리고 또한 인종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선 캠페인을 조직하는 데에 꺼렸던 유럽의 많은 백인 공산주의자들에게 이의제기를 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남아프리카연방과 이집트를 제외한 아프리카에서 공산주의 운동의 영향력은 극도로 제한적이었다. 코민테른이 라미네 상고르와 I.T.A. 월러스-존슨 등 영향력 있는 아프리카인 지식인과 노동조합 활동가에게 중요한 자원이 되었으나, 그들의 조직적 계획은 식민적 탄압으로 인해 종종 단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은 극적으로 새로운 맥락을 만들었고, 반식민운동은 식민지 비합법이라는 경계를 통해 분출하였다. 이 글의 2부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어떻게 194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동안까지 아프리카의 정치조직화에 중심적이게 되었는지에 초점을 둔다—그러한 조직화는 소련이 새로운 전지구적 초강대국으로 등장하던 같은 시기에 일어난 발전이었다.


나는 소련(과 소련의 공산주의 독트린)이 아프리카에 매우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기 시작했던 것이, 정확히 1917년 러시아혁명의 놀랍도록 해방적인 가능성이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규모 국가폭력 캠페인에 의해 지워졌을 때였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남겨진 것—소련의 강압적인 국가주도 경제발전 모델—은 신생독립국을 조직했던 많은 떠오르는 아프리카 지도자들에게 호소력 있었다.


아래에서 보여주듯이, 아프리카의 마르크스주의자, 노동자, 학생들은 아프리카사회주의(African Socialism)의 한계를 거부하였으며, 1960년대와 70년대에 되풀이되는 대규모 봉기와 파업 물결을 이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좌익반대파는 실질적이고 일관적인 청중을 얻는 데에 대개 실패했다—이는 국가 탄압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지나치게 “현실사회주의”의 하향식 모델로부터 단절하려 투쟁했기 때문이었다.


1989년 소련의 붕괴는 서구의 강대국에 의한 신자유주의 도입이 아프리카인들의 삶을 황폐하게 하고 있던 시기에 아프리카의 마르크스주의 조직들을 대단히 쇠약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대중투쟁의 폭발적인 물결은, 그와 동일한 냉전적 틀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 마르크스주의 조직들이 귀환할 수 있는 공간을 형성했다.




약해진 제국과 대담해진 반식민주의자들, 그리고 되살아난 공산주의 운동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 각지에 반식민 선동의 새로운 물결이 시작되도록 만들었다. 아프리카에 있던 주요 제국주의 세력들은 대부분(프랑스, 영국, 벨기에) 그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알려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약해져 갔다. 게다가 해외점령과 체계적 인종주의의 정당성은, 독일이 유럽을 정복하고 나치가 조직한 학살을 겪은 뒤 국제적인 규모에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었다. 연합국은 이제 유럽에서 그러한 부정의를 지우려는 헌신을 식민지—그곳에서 강제노동, 법적 권리의 부재, 인종차별이 명문화되어 남아있었다—에 적용하지 않는지 정당화해야 하였다.


많은 아프리카인들은 전쟁 동안 자국에서는 강제징수를, 유럽의 전장에서는 압제를 물리친다는 이름으로 만행을 겪어왔고, 그들이 치른 희생은 더 큰 권리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100만 명이 넘는 아프리카인 군대가 프랑스군, 영국군, 벨기에군에 합류했거나 강제 징병되었다) 전쟁 동안 및 직후에, 아프리카 대륙은 전투적인 총파업, 유럽인 상점에 대한 보이콧, 아프리카인 전쟁 베테랑이 주도한 시위, 농민들의 현금작물 수확거부, 학교에 대한 접근성을 요구하는 캠페인, 정착식민주의에 대한 무장 대응으로 요동쳤다—가장 두드러지는 경우는 케냐에서 일어난 마우마우(Mau Mau) 반란이었다.



1960년 9월 20일 뉴욕에서 중립주의 지도자들이 만나다. 밤중에 다섯 개의 핵심 중립주의 국가의 지도자들이 뉴욕 소재 유고슬라비아 유엔주재 대표본부에서 만났다. 왼쪽부터 인도의 네루 총리,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 대통령, 통일아랍공화국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 회담의 초청자인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대통령. APWire 사진


정치적 동원을 위한 공간이 이러한 행동으로 비집어 열리면서, 많은 아프리카 활동가들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인 비판을 향하였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종전에서 소련이 쥐고 있던 특별한 위상 때문이었다. 소련은 파시스트 세력에 맞선 연합군의 동원군 중 일부였으나, 동시에 서유럽 식민세력의 착취적인 관행에 대한 대안을 대표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여러 공산당은 유럽의 파시즘, 구체적으로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의 파시즘에 저항하는 데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그리고 이러한 장소에서 활동하던 공산당은 전쟁 직후에 거대 정당이 되었다. 유럽에서 공산당이 새롭게 얻은 대중성은 또한 아프리카 활동가들에게 호소하는 데에 핵심적이었고, 그 활동가들은 여러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비롯하여 그 시점까지 식민 프로젝트를 간과해 온 식민본국 정당들에 대한 가시적인 대안을 보았다. 그러므로 소련과, 소련과 제휴한 유럽의 공산주의 조직들은 대부분 신세대 아프리카 활동가들이 관계 맺었던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인 전형이었다.


1943년에 스탈린이 소련과 서구의 관계를 풀고자 코민테른을 해산하면서, 아프리카 활동가들과 공산주의 조직들 사이의 튼튼한 연결점은 대부분 식민본국을 통해 일어났다. 유럽 대학에서 공부하도록 허용을 받은 아프리카 학생들 중 극소수 분파가 종종 각지의 좌파와 관계 맺었고, 식민당국 검열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읽을 수 없었던 마르크스주의 문헌을 읽었다. 해외에 있던 아프리카 학생들은 자신만의 여러 조직을, 가장 주요하게는 영국의 서부아프리카학생회(West African Students Association, WASU)과 프랑스흑인아프리카학생연맹(Federation of the Black African Students in France, FEANF)을 만들었고, 이 조직들은 1950년대에 정치적 논쟁과 반식민 조직화를 위한 장소가 되었다.


이 그룹들이 공산주의 조직과의 연결점을 수립하면서, 학생들은 동구권, 소련, 중국에서 공부할 학자금을 받았다. 예를 들어 이러한 연결고리를 통해, 젊은 세네갈 학생인 마제무 디오는 1950년 중반에 루마니아에서 3년을 보내면서 여러 학습그룹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소련 저자들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디오는 세네갈로 돌아간 뒤 초창기에 독립아프리카당(Parti africain de l’indépendance, PAI)이라는 세네갈 최초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정당을 이끌었고, 처음으로 프랑스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요청하도록 주도하였다. 내가 아래에서 적듯이, 독립아프리카당과 청년 분파는 이후 10년동안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처음에는 식민당국에 의해, 이후에는 세네갈 국가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겪는 중에도 새로운 핵심 활동가들을 훈련시켰다.


비슷하게, 포르투갈공산당은 미래에 반식민 운동을 이끌 카보베르데/기니비사우(아밀카르 카브랄(Amilcar Cabral))와 앙골라(아고스티뉴 네투(Agostinho Neto))의 지도자를 훈련시키는 데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동시에, 전투적인 아프리카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이 유럽 공산주의자들을 따라 훈련과 회담에 참석하는 수도 늘어났다. 프랑스령 식민지의 경우, 아프리카에 거주하는 공산주의 조직원들과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전쟁 후에 단기간에 공개적으로 조직하여 프랑스의 아프리카 제국 전역에 공산주의학습조직들(Communist Study Groups, GECs)을 만들 수 있었다. 이러한 여러 인종으로 이루어진 그룹에서 모디보 케이타(Modibo Keita), 마데이라 케이타(Madeira Keita), 세쿠 투레(Sékou Touré), 가브리엘 리세트(Gabrielle Lisette), 웨친 쿨리발리(Ouezzin Coulibaly) 등 미래의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프랑스 출신 공산주의 활동가들과 함께 정치와 이론을 학습하였다. 게다가 프랑스인들이 활동가들의 압력을 받아들이고 제한된 아프리카 유권들에게 프랑스 국회에 대표자를 선택하도록 허용하면서, 첫번째 범영토적 정당인 아프리카민주연합(Rassemblement Démocratique Africaine, RDA)이 프랑스공산당과의 의회연합에 참여하였다.


떠오르던 아프리카의 정치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은 다양한 이유에서 공산주의 운동과 동맹을 맺었다. 러시아혁명의 반식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뿌리를 갖고 있던 소련은, 아프리카의 식민적 약탈에 불과한 것을 만들어왔던 서유럽 자본주의과 상이한 모델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보였다.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특히 제국주의를 자본주의 국가 간의 경제적 경쟁이 자동적으로 만든 결과라며 기술한, 레닌의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단계』(Imperialism: The Highest Stage of Capitalism, 1917)는 등사판을 돌려보았던 아프리카의 많은 젊은 지식인과 활동가에게 반향을 일으켰다.


게다가, 공산주의의 위신은 1949년 중국 혁명, 1960년 쿠바 혁명, 호치민—1920년대 라미네 상고르 등의 아프리카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함께 활동한 공산주의자—이 이끈 베트남 무장독립투쟁으로 높아졌다. 이러한 사례들은 아프리카 식민지 대부분이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에 공식적으로 독립국가가 되면서, 피식민세계에 공산주의가 적합하다는 새로운 증거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냉전이 시작되고 1940년대 후반 서유럽 정부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추방되면서, 아프리카 지도자들과 공산주의 조직들 사이의 관계는 빠르게 껄끄러워졌다. 아프리카민주연합 지도부와 같이 아프리카의 반식민 지도자들 몇몇은 자신들의 각지 노동조합과 정당에 가해진 국가 탄압을 완화시키는 대신 유럽 공산주의자들과의 동맹을 포기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제국을 감독하는 동일한 정부가 지닌 공산주의자들과 소련에 대한 반감이 늘어났던 점은 강경소수파에게 공산주의에 더욱 긴밀하게 다가갈 이유로 해석되었다.




소련 모델의 수출


공산주의 네트워크로부터 거리를 두었던 새로운 아프리카 정치지도자들에게도 소련은 여전히 한 가지 모델로서 매력적이었다. 소련이 단 몇 십 년 동안 산업적 군사적 강대국이 되고자 준-봉건적인 내력을 버렸기 때문이다. 겉보기에 소련은 식민화된 지구의 일부가 전지구적 체계 속에 있던 빈곤하고 종속적인 지위를 빠르게 극복할 방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소련(과 이후의 중국)이 혜성처럼 등장했던 것은 엄밀히 말해 1917년 러시아혁명의 여러 원칙들을 포기함으로써 일어났다.


러시아혁명—해방적이고 민주적인 대중 혁명으로서의 혁명—은 단 몇 년 동안 지속되었을 뿐이다. 혁명의 붕괴는 두 가지 주요요인에 뿌리를 두었다. 첫번째, 혁명을 지키고자 반드시 싸워야 했던 내전이 러시아의 산업경제와 노동계급—러시아혁명을 이끈 사회적 기반—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두번째, 이후 십년 동안 러시아 바깥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패배했던 점은 이 새로운 국가를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고립되도록 두었다. 이 혼란 속에서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이윽고 혁명의 민주적 기반을 재건할 수 있길 바라면서, 국가의 의사결정에 더 크게 관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기능하는 소비에트(노동자 평의회)이 없었기에, 1923년까지 국가 관료들이 소련경제에 대한 영향력을 쥐게 되었다. 이 10년의 끝자락에, 스탈린이 이끄는 한 관료 분파가 경우에 따라 폭력을 써서 반대파들을 격파하였고 집권당 내부의 공개토론을 묵살시켰다.


1924년에 스탈린과 과거의 협력자 부하린은 소련의 전망을 “일국사회주의(socialism in one country)”라고 공표하였다—일국사회주의는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이 다른 나라로 확산되지 않으면 파멸한다고 말한 레닌과 트로츠키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거부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레닌의 생각은 사후에 스탈린의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왜곡되었고,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한 국가의 자원이 러시아처럼 매우 저발전되어 있더라도 온전한 사회주의 사회를 만들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하였다. 1930년대 말까지 소련의 “일국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동일하게, 소농의 토지 강제몰수와, 짐승취급과 착취를 당하는 노동계급의 생성, 대규모 감옥노동 체계의 사용 등 잔혹한 수단 다수를 통한 국가주도 경제성장에 이르렀다.


1966년 경 콩고 브라자빌에서 마오쩌둥, 호치민, 체 게바라 등 제3세계 지도자들이 그려진 플래카드를 들고 행렬하는 청년대표단.


스탈린은 1931년에 산업관리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리면서 이러한 폭력행위를 정당화하였다. “우리는 선진국가들보다 50년 혹은 100년 뒤에 있습니다. 우리는 10년 안에 이러한 지연을 보충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해내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를 부술 것입니다.”


스탈린이 보여준 급박함은 “일국 사회주의”를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 속으로 비집어 들어가려는 시도에 대한 반응이었다. 소련은 국제적으로 군사적인 힘에서도 경제적인 힘에서도 매우 강력했던 적국들과 경쟁했고, 이 점은 스탈린 정권이 성공적으로 경쟁하고자 소련의 대규모 강탈과 착취의 과정을 가속하도록 내몰았다.


스탈린은 피식민세계에 “일국 사회주의”를 수출하고자, 1926년에 두 가지 연관된 개념을 널리 알리기 시작하였다. 그 개념이란 “단계”에 따른 혁명과 “네 계급의 블록“이다. (후자는 마오쩌둥에 의해 대중화되었다) 이 이론들이 주장하는 바는, 토착부르주아의 창조가 식민지배에 의해 질식당해왔기 때문에 식민주의에서 벗어나는 여러 민족들은 먼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혹은 민족민주주의) 발전단계를 거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점은 공산주의자들이 지식인, 농민, 노동자, 등장하는 “민족주의 부르주아”를 한데 묶는 전략적 블록을 만들도록 요구했다. 이러한 틀 속에서 피식민세계 안의 계급 차이는 제국주의에 맞선 계급간 동맹에 부차적이었다.


스탈린 사후에, 그의 이론은 “비자본주의적 발전경로(non-capitalist path to development)”라는 개념으로 대체되었고, 그 개념은 마오의 “신민주주의(New Democracy)”이론처럼 “민족민주(national democratic)”단계와 사회주의의 성취 사이의 구분이 약해지도록 모색하였다. 그러나 발전 ”단계” 개념과 “민족주의 부르주아”와의 동맹 필요성은 대부분의 아프리카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 강력히 새겨진 생각이었다.


스탈린과 마오의 틀이 미친 영향력은 두 가지이다. 첫번째, 아프리카의 (매우 중요하게 남아프리카연방의) 공산주의 조직들은 “민족주의 부르주아”의 제한적인 목표를 지지하면서도 그들에게 도전하는 사회주의적 요구를 포괄하는 경향이 있었다. 두번째, 아프리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종종 사회주의를, 국가세입을 급속도로 증가시키는 것을 목표하는 강제적인 국가개입과 동일시하였다. 뒤의 여러 절에서 보여주듯이, 이러한 핵심적인 믿음은 “아프리카사회주의”에 헌신한 탈식민국가 지도자들과 그들을 비판한 “마르크스-레닌주의” 비판가들 모두 공유하였고, 그러한 믿음은 종종 투쟁을 누가 국가 내부의 핵심 위치를 통제할 것인지에 대한 전투로 환원하곤 하였다.



아프리카사회주의(들)


소련은 급속한 국가발전을 위한 모델이자 서구의 헤게모니에 대한 대안으로서 매력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선출된 사하라이남 아프리카 나라의 국가수반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여기지 않았다. 이 점은 전혀 우연이 아니었다. 식민세력은 가능한 곳이라면 1960년대의 여러 아프리카 지도자들에게 권력 이양을 시도했으며, 그들은 과거 식민본국의 경제적 외교적 이해를 보호하길 기꺼이 원했다.


하지만 1940년대와 1950년대에 공산주의 네트워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던 신생국가의 지도자들조차 소련을 조심할 이유가 있었다. 서유럽 제국의 약화는 스탈린이 자신의 진정한 색깔을 드러낼 수 있게 하였다. 그는 전쟁 이후 동유럽 전역에 위성 정권을 설치하며 그의 제국을 확대하였다. 아프리카에서 스탈린은 이탈리아가 패배한 뒤 소련의 리비아 위임통치를 주장하기도 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스탈린은 독일의 위협에 마주하여 영국 및 프랑스와의 동맹을 만들려는 시도했고, 과거에 코민테른이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를 비판했던 것을 경시하는 전략을 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유럽 공산당들은 종종 식민지에서 특정 잔학행위에 반대하는 아프리카인들의 캠페인에 중요한 협력자였다—하지만 궁극적으로 유럽의 공산당은 아프리카에서 “자국의” 제국을 옹호하였다. 게다가 소련은 1953년에 스탈린 사망한 뒤까지 아프리카의 반식민운동을 지지하는 데에 직접적인 역할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가말 압델 나세르(이집트), 콰메 은크루마(가나) 케네스 카운다(Kenneth Kaunda, 잠비아)등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냉전의 주요 초강대국의 보호감독을 받게 될 것을 우려하면서, 대안을 형성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 대안이란 제3세계 운동(Third World movement)이었다.


제3세계 프로젝트는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에 과거 피식민세계 전역의 새로운 국가수반들을 모아, 신생독립국 정부가 미국이나 소련의 권역으로 끌려가는 압력을 견딜 수 있도록 하나의 블록을 형성하는 것을 목표했다. 제3세계 프로젝트는 회원국 사이의 경제적 협력을 촉진하고 탈식민화를 확산하며, 자라나던 핵멸망 위협을 상쇄하고자 모색했다.


제3세계 운동이 냉전 비동맹을 약속했던 것은, 아프리카 전역에서 —주로 “아프리카사회주의”라는 포괄적인 용어 속에서— 그에 상응하는 국내적 이데올로기로 번역되었고, 그 이데올로기는 1960년대 초반에 이십여 개가 넘는 아프리카 국가가 받아들였다. 대부분의 경우에, 국가 지도자들은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공동체적 사회관계, 마르크스주의, 기독교적 혹은 이슬람적 가치의 혼합물로 자신들의 전망을 정의하였다. 아프리카사회주의들은 서구나 동구의 여러 이데올로기에 들어맞지 않는 탈식민화라는 난제에 아프리카의 독특한 대응을 제시하고자 모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사회주의들은 식민적 자본주의의 착취적 본성에 대한 대응이었고, 마르크스주의가 가진 반자본주의적 사고에 대한 개방성을 반영하였다.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국가 지도자들은 식민지 이전 사회의 경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유럽 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국경을 지닌 구 식민지를 책임지게 되자, 아프리카사회주의를 과거의 평등주의적 사회구조의 부활로 표현하고 공유하는 종교적 가치들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아프리카사회주의를 민족통일(혹은 대륙통일)을 요청하는 데에 사용하였다.


이러한 아프리카사회주의 전망에 근본적인 것은 두 가지 공통 교리였다. a) 식민지 이전의 아프리카 사회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이었으며 사회계급으로 분화되지 않았다. b) 식민적 자본주의는 이러한 동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았고, 아프리카인 부르주아가 형성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며 상대적으로 소규모의 산업 노동계급을 형성시켰다.


결정적으로, 이 점은 계급투쟁이 아프리카사회주의를 확립하는 데에 핵심적인 구성요소라는 개념을 거부하는 것을 수반했다. 그러므로 국가는 계급을 초월했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가져올 수 있다. 유일한 “계급”투쟁은 부유한 나라와 빈곤한 나라 사이에만 존재한다.


따라서 아프리카사회주의는 냉전 공산주의 영역에 끌려가는 것을 견뎌내려는 욕망과 함께, 서구 자본을 의존하지 않고 급속하게 경제발전을 이끌 방법에 대한 핵심적인 교훈을 쥔 것으로 보인 소련과 중국의 모델에 대한 이끌림도 담고 있었다. 매우 거침없는 아프리카사회주의 지지자 두 명—가나의 은크루마와 탄자니아의 줄리어스 니에레레—의 경험은 이러한 틀의 한계를 드러낸다.




은크루마의 혁명


은크루마와 회의인민당(Convention People’s Party, CPP)은 1951년에 영국령 골드코스트 식민지의 제한적인 자치정부를 보호하기 위한 대중시위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6년 뒤, 식민지는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중 가장 먼저 신생주권국가가 되었고, 국가수반으로서 은크루마는 이 나라를 가나로 개칭하였다.


은크루마와 회의인민당이 가나 정치를 지배하던 첫 십년(1951-1961) 동안, 당은 식민당국에 궁극적인 정치권력 이양을 보장하도록 충분한 압력을 유지하려 모색하면서도, 동시에 자신들이 “책임감 있는” 후계자일 것이라며 식민당국과 해외 사업에게 확언하였다. 이 점은 두 가지 중요한 행동을 동반하였다. 첫번째는, 해외사업과 코코아 무역회사가 통제하는 가나 경제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회의인민당 당원에서 공산주의자와 여타 급진주의자들을 제거하고 노동조합에서 그들을 탄압하는 것이었다.


은크루마는 산업화, 농업 근대화, 경제 다양화를 요청하였지만, 회의인민당은 이 과제를 사적 투자자에게 남겨두었다. 1950년대 코코아 호황은 새 정부에 막대한 양의 세입을 주었고, 과거 식민지 마케팅보드처럼 농민들이 받는 가격을 코코아 국제시장가보다 낮게 설정하였다. 이러한 소득 중 일부는 (회의인민당이 강세였던) 도시와 마을 공공 서비스를 짓고 회의인민당에 대한 소규모 농민들의 충성을 사고자 이용되었으나, 행정부는 영국 당국을 달래고자 세입의 대부분을 여러 영국은행의 예치금으로 유지하기로 결정하였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국가소득은 해외로 격리되었고, 은크루마는 해외 투자자들을 끌어들이려 분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년까지 회의인민당 지도자들은 늘어나는 정치권력을 경제적 이득으로 활용하였다. 가나경제의 부가 주로 해외사업과 무역상들의 손아귀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경제활동은 국가에 의한 수출입관세, 조세, 계약체결을 통해 여전히 관리되었다. 회의인민당 지도자들이 점점 이러한 식민국가의 “문지기” 기능을 인수하면서, 당은 가나의 새로운 아프리카인 지배계급을 형성하는 수단이 되었다.


1960-61년에 은크루마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수사에 의존하여 “제2차 혁명”의 필요성을 선언했다. 혁명은 급속한 산업화를 향한 압력, 공산주의 세계와의 협력 증대, 국가정치에서 더 큰 대중 참여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2차 혁명”은 부분적으로 국가 관리자의 위치에서 거대한 이윤을 얻어온 회의인민당 창립 당원의 경화증에 도전하려는 의도였다.


은크루마의 새로운 압력은 시작부터 난항을 겪었다. 첫번째, 코코아 국제가격이 1950년대 후반까지 하락하면서, 은크루마의 산업화 노력은 신생 아프리카국가가 여전히 서구의 사적자본의 변덕에 얼마나 종속되어 있는지 드러내었다. 이 시기 동안의 연설에서, 그는 가나가 빠르게 산업화하지 않는다면 신식민주의에 옭조일 것이라 주장했다.


1950년대 초반부터, 은크루마 전망의 주춧돌은 볼타 강의 대규모 댐 프로젝트였고, 댐은 지방에서 채굴된 보크사이트를 바탕으로 통합적인 알루미늄 가공산업에 필요한 전력을 생산할 것이었다. 캐나다와 영국의 광업회사과의 협력이 성사되지 않자, 결과적으로 케네디 행정부가 은크루마에게 미국 알루미늄 기업에 이득을 주는 일련의 양보를 하도록 요구하며 미국의 댐 투자를 지원했고, 그렇게 하여 그 프로젝트에 대한 가나인들의 목표를 제거했다.


은크루마는 냉전 초강대국들이 서로 견제하도록 하여 미국의 댐 자금지원을 보장하였지만, 이러한 전략은 대체로 양측의 잠재적인 자금제공자들이 약속을 이행하는 데에 더욱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소련은 아프리카의 독립과 경제적 연대를 거침없이 지지하였으나, 실제로 1960년대 아프리카에서 서구 자본과 경쟁할 수 없었다—혹은 하지 않기로 정했다.


은크루마의 국가수반 임기를 결과적으로 손상시킨 것은, 해외투자자들의 변덕만이 아니라 그의 권력 사인화와 민주주의의 제거였다. 은크루마가 “레닌주의적” 당 건설 원칙을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주기적으로 촉구하였으나, 그가 갖고 있던 “레닌주의”에 대한 전망은 레닌의 것이 아니라 스탈린의 완전히 권위주의적으로 왜곡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1960년대에 은크루마가 대중참여를 증가토록 요청한 것은, 여러 대중조직, 주로 노동조합을 회의인민당 조직으로 편입시키는 일을 수반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평당원에게 정부 결정권에서 더 많은 발언권을 주는 것이 아니었고, 다원들을 점점 회의인민당 관료의 영향력 아래로 모으고 당원들의 자율성을 제거하는 데에 봉사했다.


동시에 은크루마가 “창립 당원”의 참호에 도전하고자 쓴 수단이란, 자신을 당 관료보다 높은 지위로 승격시키는 것이었다. 여러 정치지향을 지닌 반대자들은 모두 —1961년 철도 및 항만 노동자 파업의 지도자들을 포함하여—탄압을 받거나 동시에 은크루마 정권으로 포섭되었다. 1960년대 초반에 은르쿠마는 회의인민당이 가나에 사회주의를 가져올 수단이라는 믿음을 고수했지만, 그의 전망에는 치명적인 모순이 있었다. 회의인민당은 사회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기존 식민제도를 아프리카화할 정당으로서 만들어졌다. 이전에 (은크루마를 포함한) 당 지도자들은 혁명적 변화를 요청했던 이들을 침묵시키려 행동해왔다. 그리고 이제 당은 은크루마가 지휘하지만, 가나의 신흥지배계급 대부분의 거처가 되었고, 그들은 이윤을 얻는 데에 즐거워했다.


1966년에 은크루마가 군부 쿠데타로 전복되었다—CIA 관료들은 이 쿠데타를 묵인했다. 하지만 그가 엄청나게 권위를 공고히 해왔음에도, 쿠데타에 대한 반발은 거의 없었다. 은크루마를 방어할 수 있던 노동조합과 여타 대중조직들은 회의인민당으로 강제로 편입되고 진정한 정치적, 경제적 의사결정에서 배제됨으로써 해산되었고 사기가 꺾였다.




니에레레의 우자마(Ujamaa)


거의 모든 아프리카 신생독립국가들이 은크루마의 딜레마에 마주했다. 국가발전 계획을 시행하길 소망하지만, 해외투자에 계속해서 의존했다. 탄자니아의 초대 총리이자 이후 대통령이 된 줄리어스 니에레레(Julius Nyerere)는, 아프리카에서 제국주의와 신식민주의와 싸우기 위해 아프리카의 통일이 필요하다는 은크루마의 생각 중 많은 것들에 동조하였다. 니에레레는 은크루마처럼 식민지배가 야기한 자본주의적 변화를 비판했으며, 대신에 “전통적 아프리카 사회”가 현대 사회주의를 위한 자연스러운 모델을 제공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니에레레에게 탈식민 아프리카에서 사회주의란 계급투쟁에 기반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정한 사회주의란 사고의 태도”였다—그는 사회주의가 단결, 노고, 이타심에 대한 개인적인 헌신에서 생겨나며, 그러한 것들이 식민주의 이전의 활기찬 삶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1967년의 아루샤 선언(Arusha Declaration)을 통해서만, 니에레레의 이론(우자마(Ujamaa), 스와힐리어로 “가족공동체”을 의미한다)은 경제 프로그램으로 더욱 분명하게 엮이게 되었다. 탄자니아가 해외 투자자에 절망스러울 정도로 의존하던 상황은, 니에레레를 그가 “자립” 이라 부른 정책에서 자본축적의 추동자였던 농촌대중으로 향하도록 몰았다. 은크루마와 마찬가지로, 니에레레는 국가평균을 초과하는 수입을 얻는 노동조합원만이 아니라 그가 주장하기에 “전통적” 아프리카에 존재하지 않았던 도시“부랑자”들을 폄하했다. 흩어진 농촌대중을 집산적 농업계획 (우자마 마을) 안으로 재조직하려는 니에레레의 시도는 1968년에 시작되었다. 이는 —제한적인 국가의 재정투자로— 생산과 분배를 향상시킬 수단으로서 자발적이고 민주적인 마을을 만든다는 니에레레의 전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니에레레가 보기에, 우자마 마을 체계는 국가적 빈곤을 빠져나갈 방법이었고, 빠르게 논쟁에 올라가지 않고 빠르게 실행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농촌 대중은 정권의 개발 온정주의에 설득되지 않았고, 그래서 1973년과 1975년 사이에 수백만 명이 강제로 거주이전 당하였다. 강제력으로의 회귀는 —경우에 따라 대통령의 명령으로 직접적으로 이루어졌다— 니에레레가 강조해온 지방 역량강화의 기회를 축소시켰다. 탄자니아의 농업집산화는 다른 개발계획들을 추동하는 데에 필요한 세입을 끌어내는 데에 실패했고, 우자마 프로그램은 곧 붕괴하였다. 탄자니아는 10년도 안 되어 더욱 더 수입식품과 식량원조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까지 탄자니아는 엄청난 부채에 빠졌다.


콩고 브라자빌에서 일어난 혁명 이후 청년조직들의 행렬 (1965년)


사회주의에 관한 은크루마와 니에레레의 전망은 다수의 핵심 구성요소를 공유한다. 사회주의가 아프리카 사회에 내재적이라는 믿음, 자본주의와 계급사회가 유럽 식민주의에 의해 아프리카로 이식되었다는 믿음, 그러므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단일한 프로젝트로 병합될 수 있다는 믿음이 그 구성요소이다.


실제로 가나와 탄자니아에서 아프리카사회주의 정책들은 “일국사회주의” 이면에 있는 생각 중 많은 것들을 반영한다—일당 국가가 아프리카에 서구를 “따라잡”도록 여러 개발 프로그램을 강제로 시행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니에레레가 소련에 매우 적대적이었으나, 그의 정책은 농촌을 희생하는 유사모델—결과적으로 재앙을 야기한 중국의 대약진운동(1958-60년)—에서 직접 끌어온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해외투자의 변덕스러운 본성 때문에 노동자와 농민의 “희생”을 통해 국가의 자본축적을 달성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이와 같은 정책들은 이러한 축적을 방해할 수 있는 정치적 혹은 경제적 세력—독립적인 노동조합, 비협력적인 농민, 학생회, 경쟁정당, 종족적 민족주의자—의 탄압을 요구했다. 그러므로 아프리카사회주의의 지지자들은 새롭게 얻은 권위와 경제적 영향력을 이용하여 식민지를 더욱 공평하고 부유한 독립국가로 개조하려 모색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의문없이 그들의 전망에 충성하는 것만이 이 일을 가능하게 만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모색하였다.


은크루마 정권과 니에레레의 정권과 유사하게, 사회주의를 공언한 정권들은 국가세입의 상당량을 사회서비스, 교육확대, 보건에 지출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지출은 핵심적이긴 하나, 수십년 동안의 식민지 방치를 만회하고 매우 늘어나는 요구를 보상할 수 없었다. 이 정권들 역시 국영산업을 발전시키려 시도하였으나, 대부분은 저렴한 해외 수입품과 경쟁할 수 없었기에 1970년대 말에 붕괴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970년대의 위기 동안 대부분의 아프리카 수출품(농업과 광업)의 가치가 국제시장 기준에서 떨어졌고, 이는 국가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은크루마와 니에레레의 국내정책이 지닌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프리카의 여타 반식민투쟁을 지원하는 데에 헌신한 가치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그리고 그들이 아프리카에서 사회주의라는 생각을 대중화하는 역할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들의 노력 때문에 범아프리카주의와 사회주의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이후 처음으로 전지구적 규모로 서로 깊이 얽히게 되었고, 아프리카에서 흑인해방을 위한 투쟁은 디아스포라의 투쟁에 양분을 주었고 그 반대로도 이루어졌다.




아프리카사회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판


1960년대 후반까지, 아프리카사회주의 이론들은 —특히 학생조직과 노동조합에서— 늘어나던 아프리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많은 이들은 독립 이전에도 아프리카사회주의의 행동수칙에 의문을 제기하였고, 60년대 중반까지 아프리카 대륙 전역의 급진주의자로 이루어진 이러한 소규모 집단이 일반적으로 두 가지 공통적인 불만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첫번째, 그들은 아프리카의 일당정권 지도자가 부를 축적하려 국가 통제권을 이용해왔고, 그렇게 하여 —종종 “관료 부르주아”라 비난받는— 새로운 아프리카의 지배계급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비판자들에게, 탈식민 사회에서 늘어나는 불평등이야말로 니에레레와 같은 지도자들이 신생 아프리카국가 안의 계급 차이는 부차적이라고 하였던 주장은 거짓임을 보여주었다. 두번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여타 급진주의자들은 종종 “사회주의” 정부 하의 민주적 권리 탄압을 매우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일당기구 외부의 단결권을 얻기 위한 싸움을 포함한다)


이러한 반대파 흐름이 공식적으로 독립하기 이전에도 존재해왔으나, 급진주의자들은 독립 이후에 새로운 청중을, 특히 늘어나던 도시학생, 학교 졸업생, 실업청년 대중에서 발견했다. 그 청중들은 아프리카사회주의가 생활조건을 실질적으로 상승시키는 데에 실패한 것에 불만스러웠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한 국가와 지역의 정치가 나아갈 방향에 종종 적은 수에 맞지 않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 이 점은 “민족발전”을 진전시키는 국가계획에서 필수적인 구성요소였던 대학생, 공무원, 교사, 산업 및 금융 노동자들 사이에 영향력에 부분적으로 기인하였다. 이러한 부문에서 —심지어 대학에서도— 일어난 상당한 파업은 정부에 대한 직접적 공격과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대부분 탈식민 아프리카국가에서 공식적인 야당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그 중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종종 가장 뿌리깊었던) 학생과 노동조합 조직이 주도한 시위는 일반적으로 일당기구에서 표현할 장소를 찾을 수 없던 대중적 불만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


1968년 2월 24일, 카스르 엘 아이니(Qasr El-Aini) 다리를 건너 의회로 향하는 카이로대학교 학생들


첫번째로 주목할 만한 사례가 콩고-브라자빌에서 일어났다. 1963년에 노동조합들은 일당국가 형성을 막는 대규모 시위를 요청했고, 수일만에 대통령 퓔베르 율루(Fulbert Youlou)의 정부 전체를 사임하도록 만들었다. 정치적 진공상태가 형성되고 그 속에서 학생, 최근 졸업생, 젊은 공무원들인 20대로 이루어진 작은 집단이 스스로를 콩고혁명의 지적 지도자로 자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문 『디판다』(Dipanda)와 독자적인 대규모 청년조직의 조직화를 통해 콩고의 마르크스주의적 변혁을 널리 알렸고, 신임 대통령의 아프리카사회주의와 긴장 관계에 있었다. 그들은 단 수년만에 수천명의 청년 활동가를 충원하여 몇몇은 정부직으로 상승하였고, (이전에 해외행정가와 선교사들의 통제 하에 있던) 교육체계의 국유화, 수도와 전력 공급을 독전해왔던 프랑스 회사의 국유화 등 수많은 변화를 통과시켰다.


1968년 이후, 유사 군부쿠데타는 콩고의 자율적인 마르크스주의 청년조직들에 대한 탄압을 야기했다. 하지만 같은 해에 일어난 대중봉기는 지구를 휩쓸었다—그 점은 아프리카도 마찬가지였다. 1968년 5월, 세네갈의 대학생들은 장학금을 삭감한다는 정부안에 대응하여 총파업을 요청했다. 학생들이 아프리카사회주의를 고수한다고 주장했던 레오폴 상고르(Léopold Senghor) 정권에 공개적으로 도전했던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때에 경찰의 가혹한 대응은 중학생들의 전국적 파업, 수도 다카르에서 노동자들의 총파업, 다카르의 아프리카인 거주구에서 경찰과의 길거리 싸움이 분출하도록 방아쇠를 당겼다. 상고르는 결과적으로 그 상황의 통제권을 다시 얻었으나(부분적으로 프랑스 군부의 개입 때문이었다) 이후 수년간 학생들과 노동자들에게 수많은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과 노동조합의 행동에 중심적이었던 것은, 독립아프리카당 혹은 그 청년조직과 관련되어 있는 (혹은 그곳에서 훈련받은) 활동가들이었다—이 당은 위에서 기록했듯이, 1950년대에 마제무 디오가 창립한 불법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이었다.


같은 해에, 이집트에서 산업노동자와 학생들이 주도한 여러 격변이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dbel Nasser) 정권에 최초로 실질적인 대중적 도전을 가져왔다. 나세르는 아랍사회주의(Arab Socialism)—아프리카사회주의와 유사한 정식화—라는 기치 아래에서 활동하는 일당국가를 통제하였다. 나세르는 고도로 권위주의적인 지배를 여러 정책과 결합하였고, 이러한 정책들은 교육기회와 사회서비스를 대규모로 확대하고, 산업을 국유화하고 확대시키며, 이집트를 제3세계 연대의 봉화대로 만들려 모색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위로부터의 성과는 좌절감이 끌어 넘치는 것을 막지 못했다. 1967년에 이스라엘에 대한 이집트의 군사적 패배와, 국립대학 진학 학생수를 제한하는 정부안은 파업과 시위의 두 차례 물결에 방아쇠를 당겼고, 파업과 시위는 빠르게 더 큰 정치적 자유를 얻기 위한 운동으로 변했다. 여기에서 나세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비판자들로 이루어진 소규모 집단이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다.


니에레레의 탄자니아에서, 아프리카 전역에서 온 좌파학생들의 서클이 1967년 다르에살람 대학교(University of Dar es Salaam)에서 대학생아프리카혁명전선(University Students African Revolutionary Front, USARF)을 형성했다. 대학생아프리카혁명전선은 부분적으로 월터 로드니(Walter Rodney)와 같은 마르크스주의 교원과, 사미르 아민(Samir Amin), 안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 C. L. R. 제임스(C. L. R. James)의 방문연사들에 영감을 받았다. 대학생아프리카혁명전선의 출판물 『체체』 (Cheche)는 스와힐리어로 “불꽃”을 의미했다—본래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이 본래 관리했던 동명의 혁명적 신문을 참고한 것이었다. 그 신문은 파농과 레닌, 마오만이 아니라 기니비사우의 마르크스주의 반식민 지도자 아밀카르 카브랄(Amilcar Cabral)의 사상을 대중화하려 시도했다. 게다가 신문은 “아프리카 모든 곳에 싹터온 소위 ‘사회주의[들]’”을 직접적인 목표로 삼았고, 또한 아루샤 선언에 대한 이사 시브지(Issa Shivji)의 신랄한 비판을 출간하였다.


정부는 해당 잡지와 대학생아프리카혁명전선을 금지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금지령을 다룬 국영신문의 한 기사는 매우 흥미로운 점을 보여주고 있다. “탄자니아 청년은 인민의 제도화된 기관을 통한다면, 그들이 바라는 만큼 급진적이고 혁명적일 수 있다.” 즉, 당-국가라는 공식적 기관을 통하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여러 투쟁은 니에레레 정권을 계속 흔들었다. 1971년에 국유 산업 및 민간 산업의 노동자들이 새로운 당 지도안에 반응하여 (당시에 불법이었던) 2년에 걸친 파업의 물결을 시작하였고, 관리자들을 추방했으며 공장을 점거했다—이 행동은 니에레레가 단호하게 노동자들을 규탄하고 힘으로 내쫓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이와 같거나 비슷한 투쟁의 역사는 세 가지 되풀이되는 주제를 보여준다. 첫번째, 많은 청년활동가들이 아프리카사회주의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 종종 마르크스-레닌주의라 칭했던 것(스탈린이 본래 정식화한 것과 약간 다른 함의를 지닌 용어)으로 향하는 뚜렷한 변화가 있었다. 당시의 많은 청년 아프리카 급진주의자들이 생각하기에, 그들의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계급투쟁이 신식민 세력만이 아니라 신흥 아프리카 지배계급에 도전하는 데에 필수적이라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것은 “아프리카사회주의”에서 가정된 문화적 뿌리를 거부하고 소련, 중국, 쿠바의 사례에서 나온 사회주의로의 보다 보편적인 경로를 지지하였다.


이러한 전환은 부분적으로 아프리카사회주의 정부들이 평등과 상승된 생활수준을 전달하는 데에 실패한 것에 대한 반응이었다—이러한 실패는 많은 청년들이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쿠바 혁명에 새로운 영감을 찾도록 이끌었다. 하지만 또한 아프리카에 대한 냉전적 개입의 점점 양극화되는 영향력이 “제3의” 경로에 남아있는 시도를 점점 어렵게 만들었다. 외부 개입, 특히 서구의 개입의 위협은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이런저런 공산주의 진영으로 밀어넣었다.


많은 급진주의자들은 여러 아프리카국가 내부에 계급차이가 존재하며 계급투쟁이 벌어진다고 주장하면서도, 모두에게 열려 있는 유일“대중”정당 모델이 역효과를 초래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대신, 많은 이들은 “진정한” 혁명가들로 이루어진 소규모 정당들이 국가 통제권을 얻어 국가를 참된 마르크스주의적 지향 위에 놓을 필요가 있다는 한 가지 모델을 널리 알렸다. 그러나 아프리카사회주의 비판자들은 일반적으로 한가지 핵심적인 믿음을 자신들이 반대하는 이들과 공유하였다. 사회주의는 국가 중심의 하향식 프로젝트였다—마르크스가 (그리고 레닌이) 주장해온 의미의 대중민주주의에 진정으로 근거하지 않은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대개 대중봉기의 지원이나 군사 행동을 통해 지휘권을 쓸어 담고자 하였다.


사회주의가 인민을 “대신하는” 극소수에 의해 은밀히 조직될 수 있다는 개념은 어쩌면 1917년 러시아혁명의 붕괴와 스탈린을 중심으로 한 관료제의 등장이 남긴 가장 잔인한 유산일 것이다. 명확히 하자면, 1960년대까지 소련은 마르크스주의의 개념들을 더 이상 독점하지 않았다. 중국과 쿠바만이 아니라, 트로츠키주의, 나아가 이와 같은 것들의 여러 측면들을 국제주의 블랙파워라는 틀과 뒤섞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혼종적 해석들은 모두 1917년 레닌과 볼셰비키의 발자국을 따라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독립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대열 또한 1960년대에 급격히 팽창했다—탄자니아의 이사 시브지, 세네갈의 아마디 알리 디엥(Amady Aly Dieng), 콩고의 앙게 디아바하(Ange Diawara), 나이지리아의 트로츠키주의자 에드윈 마두나구(Edwin Madunagu)는 이 시기 동안 그들의 저술과 조직화를 통해 잘 알려지게 된 많은 이들 중 소수에 불과하다.


1970년대 초반까지 마르크스주의 반대파 조류는 강해져 갔고, 아프리카 정부들이 그 개개인을 포섭할 뿐 아니라 (나이지리아에서는 개인의 포섭이 흔한 일이 되었다) 전체 혁명적 운동을 포섭하려 시도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콩고-브라자빌이 그런 경우였다. 청년장교 집단은 콩고혁명의 통제권을 장악하였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부를 만든다는 명목에서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독립적인 조직화를 탄압하였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1974년 에티오피아 대중혁명의 상실이었다. 권력은 군사정권, 즉 데르그(Derg)의 몫이 되었고, 데르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새로운 권위주의 국가를 만들고자 노동자 파업과 학생 시위의 급진주의를 포섭하였다.




무장투쟁과 공산주의세계의 역할


1960년대 아프리카 독립국가에서 반대파 마르크스주의 조류들의 발전은 여전히 식민지배에 처한 곳에서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임한 이들이 주도한 무장투쟁과 서로 영감을 주고받았다. 60년대 중반까지 반식민 선동이 아프리카 대부분에서 프랑스, 벨기에, 영국의 지배를 몰아냈다. 하지만 아프리카 대륙의 몇몇 지역에서는, 식민정권과 백인소수파 정권이 상징적 개혁보다 더 많은 것을 내주기를 꺼려했다. 이 점은 특히 포르투갈 식민지인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와, 정착민 국가인 남부 로디지아(짐바브웨), 남아프리카연방—그리고 남아프리카연방의 식민지인 서남아프리카(나미비아)—에 해당되었다.


포르투갈 국내경제의 약점을 고려하자면, 포르투갈의 강고한 파시스트 독재정은 아프리카 식민지 —특히 자원이 풍부한 앙골라— 없는 미래를 구상하는 것을 거부했다. 비슷하게 남부 아프리카의 백인소수파 정권들도 케냐와 알제리에서 여러 게릴라 운동의 손에 백인 정착민 공동체가 패배하는 것을 목격한 뒤,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기를 결심하였다.


그러므로 1950년 후반까지 대부분의 아프리카에서 공식적인 식민지배는 종식되어 갔으나, 포르투갈 식민지와 정착 식민지에서 탄원, 파업, 평화시위를 통한 아프리카인들의 선동은 여전히 유혈탄압을 겪고 있었다—이 점은 악명높은 1960년 3월 남아프리카연방 샤프빌에서 일어난 학생들에 대한 학살사건이 증명한다. 비슷하게 1956년과 1959년 사이에 기니비사우의 선도적인 반식민 정당인 기니비사우-카보베르데아프리카독립당(Partido Africano da Independência da Guiné e Cabo Verde, PAIGC)은 수도 도시주민을 동원하는 데에 초점을 두었고 결국 1959년 항구 파업에 이르도록 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은 협상을 거부하였고, 대신 비사우에서 파업참가자들을 적어도 50명 살해하였다.


포르투갈 식민지와 정착민 식민지의 반식민 활동가들은 여러 정권들의 엄중한 폭력에 마주하여, 몇 가지 전략적 선택지 밖에 없다고 느꼈다. 대부분은 1960년대 초반에 다음과 같은 양면적인 접근법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농촌에 기반한 게릴라 투쟁과 국제외교적 캠페인을 동시에 이끌었다. 비사우에서 파업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학살이 일어난 뒤에, 아밀카르 카브랄의 지도 아래에 소규모로 존재하던 기니비사우-카보베르데아프리카독립당은 인접한 기니-코나크리에 있는 난민들을 모아 기니비사우로 침입하도록 조직하여 시작하여, 농촌 반란을 추진하고자 하였다—이러한 전략은 거의 같은 시기에 앙골라, 모잠비크, 남아프리카연합에서 반식민 조직들이 받아들인 전략이었다.


무장투쟁을 지지하는 아프리카인들은 다양한 정치적 배경에서 나왔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중심에 있었다. 1960년대 후반까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무장투쟁으로의 전환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점은 몇 가지 중요한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첫번째, 쿠바와 베트남의 사례는, 급진주의자로 이루어진 소규모 핵심집단이 농민군을 발달시키고 더욱 강력한 군대를 물리쳐 제3세계에 마르크스주의를 가져올 수 있다는 증거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였다. 두번째, 한편으로 소련과 쿠바를 다른 한편의 미국과 남아프리카연합과 겨루게 하는 냉전적 적대는 점점 아프리카의 “열”전을 유발하고 있었다.


기니비사우-카보베르데아프리카독립당의 아밀카르 카브랄과, 피델 카스트로


미국은 이미 폭력적 수단을 통해 친미정권을 수립해왔다—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는 미국이 1961년에 콩고 총리 파트리스 루뭄바(Patrice Lumumba) 암살을 지지하고 조제프 모부투(Joseph Mobutu) 장군의 등장을 지원한 것이었다. 미국은 (미국이 공산주의에 대한 방어벽으로 보았던) 포르투갈 독재정과 동맹을 계속하여, 포르투갈의 식민지 전쟁을 지지하는 데에 이르렀다. 한편 쿠바인들은 1960년대 초빈부터 중부 아프리카의 좌파 세력들을 지원하는 데에 적극적이었다. 1960년대 후반에, 소련은 남부 아프리카에서 국가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 유망한 무장집단들을 (종종 쿠바를 통해) 진지하게 지원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령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무장투쟁은, 특히 기니비사우-카보베르데아프리카독립당의 성공은 결과적으로 포르투갈에서 혁명의 고조에 방아쇠를 당겼고, 혁명은 1974-75년에 독재정의 전복과 식민지의 독립을 야기했다. 특히 앙골라에서, 이 새로운 상황이 서로 경쟁하는 냉전 강대국의 직접적 개입을 유발했고, 각국은 새로운 국가정부에 대한 통제권을 위해 겨루는(vying for) 반대세력을 지원했다. 이것은 대리전 이상이었으며 —(소련에 의해 앙골라로 파견되었고 소련제 무기를 장비한) 수만 명의 대규모 쿠바군은 CIA가 지원하는 남아프리카연합 군대와 싸웠다— 앙골라 북부에 있는 중국이 지원하는 세력들에 대한 전쟁이기도 했다. 쿠바/소련의 개입은 결과적으로 아고스티뉴 네토가 배후에 있던, 앙골라해방인민운동(Movimento Popular de Libertação de Angola, MPLA) 내 한 분파가 헤게모니를 쥐도록 보장하였다—그리고 이 당은 오늘날 앙골라의 집권당으로 남아있다.


1960년대의 반대파 마르크스주의 조직들처럼, 1970년대에 무장투쟁을 주도한 마르크스주의를 자처한 조직들은 외부개입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 완전히 반대로, 소련은 자국에 다가오는 (혹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아프리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상대해야만 한다는 점을 자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소련 정권이 이러한 세력들을 지원하기로 한 결정은 많은 경우 이데올로기적 동의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소련은 대규모의 민주적인 반대파운동이 아니라 —협상하기 더욱 쉬웠던— 전투원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핵심조직을 지원하는 것이 더 편안하다고 느꼈다.


독립 이후에 기니비사우의 기니비사우-카보베르데아프리카독립당, 앙골라의 앙골라해방인민운동, 모잠비크의 모잠비크해방전선(FRELIMO)이 남긴 기록은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당들은 불행히도 유사한 패턴을 따랐다. “사회주의”란 계몽된 국가지도자들의 소규모 집단에 의한 정책 시행과, 국가통제 바깥에 있는 대중적인 조직과 요구에 대한 탄압이 결부된 것이었다. 1970년대 후반까지 앙골라에서 에티오피아까지 “마르크스-레닌주의”라고 알려진 수 많은 정부들은 아프리카에서 작동하였으나, 대중투쟁과의 연결점이나 심지어 사회주의에 대한 뚜렷한 전념과도 점점 분리되었다.




냉전좌파의 붕괴와 사회주의 부활의 씨앗들


소련이 독립 이후 초창기 몇 년 동안 아프리카 신생정부를 재정적으로 외교적으로 지원하는 데에 뒤늦게 전념하였지만, 1980년대까지 소련의 지원에 의존하는 수많은 아프리카 피후견정권을 발달시켜왔다. 1980년대 말에 동구권의, 이후 소련의 붕괴는 피후견정부만이 아니라 또한 소련의 후원에 의존했던 아프리카 대륙의 여타 좌파조직들에게 신속히 타격을 입혔다. 동시에 1970년대의 금융위기 이후 1980년대까지, 냉전적 분열 양측에 있던 아프리카 정부들은 채무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갔다. 이 정부들은 곧 국제채권자들—주로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과 같은 서구의 금융기구들—로부터 정부가 작동하도록 유지하는 데에 절망적으로 필요한 채권을 받으려면, 사회서비스를 제거하고 공공부문 노동자의 거대한 층을 해고하며 화폐를 평가절하하고 국가산업을 민영화하도록 압력을 받았다.


이러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압도적인 다수의 아프리카인들에게 미친 영향력은 파괴적이었다. 1990년대에 여러 시위가 동유럽과 소련을 휩쓸자 아프리카인들도 반란을 일으켰으며,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종종 주도한 이 반란은 미국 혹은 소련과 동맹한 모든 정권들의 일당지배를 (적어도 일시적으로) 종식시키게 만들었다. 이러한 대격변은 수십년 동안의 민주주의적 권리의 탄압에 대한 반대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지만, 마찬가지로 구조조정의 영향에 대한 분노로 치솟은 것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당시에 아프리카에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거의 신뢰받지 못했다—소련이 붕괴하고, 몇몇 권위주의적 아프리카국가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림막으로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1990년대 초반 아프리카에서 엄청난 가능성이 있던 이 순간은 대개 더욱 심화된 신자유주의 시행, 아프리카 자원에 대한 제국들의 새로운 쟁탈전, 더욱 막대한 수준의 사회불평등, 내전, 일당지배의 귀환으로 악화되었다.


그러나 지난 25년은 아프리카에서 사회주의 조직이 부활할 단계를 마련해왔다. 은크루마와 니에레레의 유산들은 그 모순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대륙 전역의 청년활동가들과 노동자들에게 시금석이 되었으며, 그들은 신자유주의의 참혹함에 대한 대안으로서 일정 형태의 사회주의로 향하도록 불러일으켰다. 비슷하게, 부르키나파소의 거침없는 마르크스주의 지도자(1983-1987년 재임) 토마스 상카라(Thomas Sankara)의 유산은 2011년과 2014년의 격변에서 시위와 파업에 참가한 이들에 의해 불러 일으켜졌고, 이 격변은 매도당하는 블레즈 콩파오레(Blaise Campaoré) 대통령이 권좌에 있은지 27년만에 마침내 사임하도록 만들었다. 애덤 메이어(Adam Mayer)가 최근에 기록하였듯이, 나이지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영향력은 현재의 노동 및 젠더 조직화로 이어졌다—가장 주목할 만한 경우는 나이지리아에서 지난 20년 동안 있었던 9번의 총파업이었다.


현재 10년 동안, 민주주의적 권리 탄압과 수십년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 유발된 빈곤에 반대하여 노동자들이 주도한 투쟁들이 아프리카 대륙 전역에서 분출되었다. 이러한 운동들은 어떻게 사회적 평등과 (모든 형태의) 제국주의 종식이 진정으로 실현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선두에 놓아왔다. 이러한 투쟁에서 사회주의 사상과 조직은 과거 아프리카사회주의 정부들(그리고 대부분의 좌익반대파)이 수용한 하향식 틀에 중점을 두지 않고 성장할 (혹은 발생할) 공간을 갖고 있다. 스탈린과 마오의 이데올로기적 영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그 점은 대중투쟁과 민주적 참여에 근거한 아프리카의 사회주의에 관한 전망에 필요한 더 큰 공간을 형성해왔다—대중투쟁과 민주적 참여는 1917년 러시아혁명을 100년 전 지구 각지의 마르크스주의에게 영감을 주는 시금석으로 만든 혁명적 원칙과 동일하다.


하지만 1917년 볼셰비키들은 또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본성상 전지구적이기 때문에 사회주의 국가들—특히 노동계급이 소수인 국가—은 그러한 착취적 관계에서 단순히 탈궤할(delink)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사회주의 국가들은 대안적인 국가블록을 형성하여 그러한 뒤 더욱 강한 세력들과 국제자본주의시장에서 경쟁하도록 내몰리는 선택에 의존할 수도 없다. 그와 같은 수단은 아마도 혁명의 붕괴를 모면할 수도 있겠지만,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적 경쟁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혁명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대신 코민테른 초기의 국제주의는, 식민적 관계의 양끝에 있는 인민대중의 해방이 자본주의에 대한 공동투쟁으로 묶여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탈식민 아프리카의 입장에서, 이 주장은 제국주의 중심부에서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과 아프리카에서 지배계급에 대한 투쟁이, 연대와 공유하는 이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동시에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의미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원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