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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조셉 다허, 시리아 봉기의 사회적 기원들

원제: Syria: The Social Origins of the Uprising


시리아 정치경제 분석


https://www.rosalux.de/en/publication/id/39116/syria-the-social-origins-of-the-uprising/



2013년 알레포, 부스탄 알 카스르(Boustan Al Kaser)에서.

도하 핫산(Doha Hassan), 로자룩셈부르크 재단.




시리아에서 대중봉기가 시작되어 점점 국제전쟁으로 변화한 지 7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봉기의 분출된 원인은 종종 망각되었다. 그 원인을 논의할 때, 상당히 많은 저자들은 봉기를 권위주의에 대한 투쟁으로 환원하고 거의 완전히 그 사회경제적 뿌리를 부정한다. 하지만 현대 시리아의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에 장애물을 구성하는 방식이야말로 시리아 봉기의 대중적 기반을 이해하는 데에 핵심적인 요소이다. 이 운동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는 경제적으로 소외된 수니파 농촌 노동자와, 특히 바샤르 알 아사드(Bashar al-Assad)가 2000년에 권력을 획득한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도시의 피고용자와 자영업 노동자이다. 이들리브, 다라, 여타 중간규모 도시만이 아니라 농촌지역에서 일어난 반란들의 지리는 한 가지 패턴을 보인다—말하자면, 이 모든 지역은 역사적으로 바트당의 근거지였고, 1960년대 농업개혁에 수혜를 입었다는 점이다.




바샤르 알 아사드 하의 신자유주의 가속화


바샤르 알 아사드가 2000년대 권력을 얻은 뒤, 시리아는 10년 동안 신자유주의 정책의 도입이 가속되는 것을 겪었다. 그리고, 이 정책은 새로운 지배자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는 도구를 드러낸다. 바샤르는 자신의 아버지와 달리 세계은행과 IMF가 경제자유화 과정에 관여할 수 있게 허용했다. 2005년에 바트당 제10차 지역대회에서 “사회적 시장경제”가 새로운 경제전략으로 수용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국가가 아니라 사적 부문이 경제발전과정에서도 고용을 제공하는 데에도 협력자이자 주도자가 될 것이었다. (Abboud 2015: 55) 그 목표는 주로 경제의 시장화를 통한 사적 축적을 촉진하는 반면, 국가는 사회복지 제공에 핵심적인 영역에서 후퇴하는 것이었다. 이 후퇴는 이미 존재하던 사회경제적 문제를 악화시켰다.


해외투자와, 시리아 국민과 국외거주자들이 특히 서비스 부문에서 시리아 밖에서 쥐고 있는 자금을 끌어오는 것은, 이 새로운 경제전략에서 근본적인 것이었다. 해외직접투자는 2002년 기준 1억 2000만 달러에서 2010년에는 35억 달러로 뛰어올랐다. 투자 유입은 무역, 주택업, 은행, 건설, 관광의 호황을 이끌었다. (Hinnebush 2012: 100)


사경제의 비중은 계속 늘어나 2010년에 시리아 GDP의 65퍼센트에 (몇몇 추정에 따르면 70퍼센트가 넘는다) 이르렀고 가장 거대한 고용자가 되었다. 시리아 노동인구의 근 75퍼센트가 사적 부문에서 일하였다. (Achcar 2013: 24)


신자유주의 정책은 시리아 상층계급과 (특히 여러 걸프왕국과 터키 출신의) 해외투자자에게 이득을 주었고, 그 대가로 광범위한 다수의 시리아인들은 인플레이션과 생계비 증가에 타격을 입었다. 이 시기동안 정권은 집단과 개인에 대한 기업부문의 이윤에 물리는 세금을 상당히 깎았다. 이러한 조치는 이미 조세회피가 널리 퍼져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도입되어, 몇몇 추정에 따르면 2009년에 1000억 시리아 파운드에 이르었다. (Seifan 2013: 109)


시리아 전체 기업체 중 99퍼센트 이상을 이루는 중소규모 기업은 거의 대부분 시장화와 경제자유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시리아 경제는 점점 지대에 기반하게 되었고, 생산부문의 비중은 1992년 기준 GDP 중 48.1퍼센트에서 2010년 기준 40.6퍼센트로 줄어들었다. 국내 소득의 임금 비중은 2008-2009년에 33퍼센트 미만으로, 40.5퍼센트에 가까웠던 2004년에 비교하여 줄어들었다—이는 이윤과 지대가 GDP의 67퍼센트 이상을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유화 조치는 보조금의 저하, 공공부문 고용확대의 중단, 국내투자에 국가의 역할 감소를 동반하였다. 사회안전에 대한 지출은 2000년대에 연금체계의 감축으로 상당히 줄어들었다. 보건 및 교육 지출은 인구성장에 따라 늘어나지 않았다. GDP 대비 지출에서 교육 부문과 보건 부문의 비중은 2010년 이전에 각각 근 4퍼센트와 0.4퍼센트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권은 보건과 학교, 특히 대학과 전문대학의 점진적인 사유화를 추진했다. 이러한 과정은 공공보건서비스의 질과 야의 감소를 동반했고, 시리아인들이 기초서비스를 누리기 위해 사적부문으로 향하도록 강제했다. 핵심 식품만이 아니라 가스와 여타 에너지원에 대한 보조금 또한 제거되었다. 가격의 자유화는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생산물이 점점 최저소득 가구에게 비싸서 누릴 수 없게 됨을 의미했다. (Abboud 2015: 55)


사회서비스가 늘어나는 불평등을 덜어줄 책임은 점점 사적 자선단체로 이동했고, 그러므로 부르주아와 시리아 사회의 종교보수층, 특히 종교단체로 이동했다.


농업에서는 토지 사유화가 일어났고, 그 대가로 북동부 출신의 수십만 명의 소농이 도시로 내몰렸다. 특히 2007년과 2009년 사이에 백만 명의 소농들이 국제적인 원조와 식량공급을 받았던 가뭄이 일어난 뒤에, 30만 명이 다마스쿠스, 알레포 등의 도시로 내몰렸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재앙은 단순히 자연재해의 결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 가뭄이 일어나기 이전에도 시리아는 2002년과 2008년 사이에 농업노동인구의 40퍼센트를 잃어, 그 중 농업노동자의 수는 140만 명에서 80만 명으로 떨어졌다. 농업부문의 고용비중은 2000년 기준 32.9 / 30 퍼센트에서 2011년 기준 단 14 / 13.2 퍼센트로 떨어졌다.


농업 자유화 조치는 2000년 말부터 바샤르 알 아사드 치하에서 일어났다. 북부의 국영농장은 40년 이상 집산적 소유 상태였으나 사유화되었다. 하지만 미리암 아밥사(Myriam Ababsa)라는 한 연구자에 따르면, 이러한 사유화 과정의 진정한 수혜자는 예전의 국가자산을 적법하지 않게 임대할 수 있었던 투자자와 기업가들이었다. 토지 소유는 점점 소수의 손에 집적되었다. 2008년에 28퍼센트의 농업인이 관개지의 75퍼센트를 활용하고 있었지만 49퍼센트는 단지 10퍼센트만을 갖고 있다는 점은, 이 부문의 불평등을 증거한다.




신자유주의 정책과 전제적 팽창


신자유주의 정책과 심화되는 사유화과정은 바샤르 알 아사드와 정권과 연관된 친척과 여타 인물들의 손에 있는 새로운 독점을 만들었다. 이들은 가족의 연이나 공직과 정부직위, 군사와 치안에서의 직위를 통해. 라미 마크루프(Rami Makhlouf)는 바샤르 알 아사드의 사촌이자 시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으로, 정권이 주도하는 마피아 스타일의 사유화 과정을 드러낸다. 그의 광범위한 경제제국은 통신, 석유가스만이 아니라 건설, 은행, 항공, 소매업 등을 아우른다. (Seifan 2013: 113) 국가부르주아와 고위관료집단에서 등장한 새로운 기업가들의 역할은, 시리아 경제생활에서 두드러져갔고, 점점 전통적인 구 부르주아가 차지하던 지위를 차지했다.


그러므로 정권은 약탈적인 활동을 확대시켜 “국가로부터 얻어낸 지대”에 대한 통제에서 약간의 투명성조차 없이 “사적 지대”를 지배하도록 허용하는 지위까지 이르렀다. 또한 이러한 새로운 소득은 지배 엘리트가 측근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게 하였고, 그들의 충성심은 시장 비중과 보호로 구매되었다.




시리아 신자유주의 기획의 사회경제적 결과들


바샤르 알 아사드의 정치지배와 경제정책은 전례없는 사회의 빈곤화로 이어졌고, 부의 불평등은 계속 늘어나 2000년부터 2010년까지 실질 GDP는 연평균 4.3퍼센트 증가하였으나 매우 소수층의 경제엘리트만 수혜를 입었다. GDP는 두배 이상 증가하여, 2005년 기준 288억 달러에서 2010년에 약 600억 달러로 변화하였다.


2003-2004년에 총 인구의 하위 20퍼센트가 총 지출의 7퍼센트만을 차지하는 반면, 상위 20퍼센트는 총 지출의 45퍼센트를 담당하였다. 2007년에 빈곤선 밑에 있는 시리아인의 비중은 33퍼센트로, 거의 700만 명의 사람들을 의미하며, 그 중 30퍼센트는 이 수준에서 약간 위에 있었다.


15세 이상 인구의 경제활동참가율은 사실상 2001년 기준 52.3퍼센트에서 2010년에 약 42.7~43.5 퍼센트로 하락했다. 이것은 정권의 실패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직접적인 결과로, 잠재적인 노동시장 진입자, 특히 젊은 대학졸업자들을 흡수할 수 없다는 점이 증명되었다. 시리아 경제는 2001년과 20101년 사이에 순 40만 개의 일자리만을 만들었고 그 연간증가율은 0.9퍼센트였으며, 이는 2001년 기준 47퍼센트에서 2010년 기준 39퍼센트로 고용률의 감소를 야기했다. 경제활동참가율의 감소는 농촌지역과 도시지역 모두에서 일어났지만, 지방이 더 심각했다.


여성은 이러한 발전에 상당히 고통받았고, 15세 이상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2001년과 2010년 사이에 21~20.4퍼센트에서 13.2~12.7퍼센트로 감소했다—이는 세계에서 매우 낮은 사례이다. 남성의 경제활동참가율 역시 동일한 시기에 81퍼센트에서 72.2퍼센트로 줄어들었다.


경제 자유화는 노동시장에도 결과를 미쳤다. 봉기가 일어나기 전에, 비공식부문은 시리아 경제에 중대한 기여를 했다. 제10차 5개년 계획의 추정에 따르면, 전체 고용 중 약 30퍼센트와 GDP의 약 30~40 퍼센트를 기여했다고 계산되었다. 이는 적어도 비공식 부문이 공식부문 못지 않게 생산적임을 제시한다. 기록할 가치 있는 점은, 50퍼센트 이상의 비공식부문 노동자들이 15세와 29세 사이라는 점이다. 이 수치는 자유화 기간 동안 시리아 청년들이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었음을 드러낸다.


실제로 도시 주변의 빈민촌이 상당히 늘어났고, 걸프자본의 유입과 지대통제의 종결로 폭발적으로 늘어난 도시 부동산 투기는 주택가격이 중산층의 평균을 넘어서게 만들었다. (Hinnebush 2012: 102) 이 점은 많은 시리아인을 도시 주변부로 밀어넣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불법주거를 하며 살도록 강요받았다. 그 결과 이것은 주택 위기로 이어졌다—2007년 시리아경제센터(Syrian Eocnomic Center)에 따르면 공식주거지가 약 150만이 부족하며(다음에서 인용. Goulden 2011: 188-190), 그 중 일부는 노숙을 하거나 비공식 구역에 거주하고 있다. (Hinnebush 2012: 102) 예를 들어 1981년과 1994년 사이에 비공식 부문은 다마스쿠스에서만 신규주택의 필요성 중 65퍼센트를 마주했고, 시리아 전체의 경우 50퍼센트를 차지했다. (Goulden 2011: 188)


비공식주택에 거주하는 인구의 비중 추정치는 다양하지만, 주로 30~40퍼센트 사이에서 요동친다. 이 추정치는 50퍼센트보다 높을 수도 있다. (Goulden 2011: 188) 알레포에서 29곳의 비공식 정착지(지방정부에 등록된 총 114곳의 마을 중)가 도시의 거주지 중 약 4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으며, 추정상 250만 명의 인구의 거주지였다. (Ahmad 2012: 8) 이 거주구는 허술하게 지어져 살기에 위험할 뿐 아니라, 의료 서비스를 결여하고 있으며 공공보건시설이 거의 없다. (Goulden 2011: 201)


빈민의 비중은 도시지역(38퍼센트)에 비해 농촌지역(62퍼센트)이 높으며, 총 실업자 중 절반이 넘는 수(54.2퍼센트)가 농촌지역에 위치하였다.

1980년대 이후 시리아의 농촌지역은 지속적인 빈곤화가 있었지만, 2006년부터 시작된 가뭄은 농촌으로부터의 탈주를 가속하였다. 이 상황은 약 2.5퍼센트의 연간 인구성장률에 의해 악화되었고, 이는 특히 농촌지역의 중소규모 마을에 영향을 미쳤다. 농촌의 빈곤층 인구의 수는 1980년대 이후로 5배에서 10배까지 증가하였다. 국가가 이 마을에 제공하는 공공서비스는 늘어나지 않았고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로 줄어들었다. 그 결과 지역주민의 생활조건이 악화되었다. (Baczko, Dorronsoro and Quesnay 2016: 46-47)




결론


바샤르 알 아사드의 권력장악은 국가의 세습적 특징을 상당히 강화시켰고, 정권 내부 서클 안의 족벌자본가들(crony capitalists)이 비중이 증가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졌다. 바샤르 정권의 가속받은 신자유주의 정책은 정권의 본래 사회적 기반이 많이 변화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본래 소농, 정부피고용인, 일부 부르주아로 이루어졌던 사회적 기반은, 정부의 심장부에서 정부와 연합하는 족벌자본가들로 변화하였다—이 족벌자본가들이란 (아사드의 외가가 이끄는) 정치 브로커들의 지대추구 연합과, 정권이 지원하는 부르주아와 중상층 계급들이다.


자유화로 인해 뒷편에 남겨진, 특히 농촌과 중간규모 도시에 사는 많은 이들이 봉기의 중심에 있다. 민주주의의 부재와 시리아 사회 다수층의 빈곤화 증가는 부패와 사회불평등의 증가를 배경삼아 대중반란의 기반을 준비하였다. 봉기는 단지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시리아 봉기 초기에 시위자들은 튀니지와 이집트의 봉기에 영감을 받았고, 다라에서 사건이 일어난 뒤에 시리아에서도 비슷한 운동을 시작할 기회를 보았다.